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19> 낚시로 상심을 달래고 -114-

화이트보스 2009. 5. 20. 17:16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19> 낚시로 상심을 달래고 -114-

나는 온갖 시달림과 고민을 달래고자 낚시를 즐겨 다녔다. 당시 군에서는 골프가 유행이었는데 내 처지로는 맞지 않는다고 보고 낚시를 택했다.

이계완(육사8기·사단장·민방위본부장·충남지사·중장 예편) 인력관리처장이 일부 과장들을 대동하고 일요일이면 지방으로 낚시를 다녔는데 이때 나도 일원이 돼 따라나섰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응원군은 없고 갈수록 고립되는 기분이었다. 정말 개혁은 고독하다는 것을 알았다.

인사상의 불이익을 당했다며 나에게 호되게 항의하는 측은 그래도 순진한 편이다. 일부는 장춘권(육사2기·군단장·소장 예편) 인사참모부장, 김계원 육참총장 등 윗선에 대고 항의하는 일이 빈발했다. 그때마다 총장실이나 인사참모부에 불려 가 설명해야 했다.

그 규정이 정당한가, 인력 감사가 공평했나, 병력 감축을 그렇게 단행해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답변이다.

육군 50만 명과 해군·공군·해병대 10만 명 등 60만 명의 병력을 다룰 때 사실 흠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다. 새 제도 하에서도 어느 부대는 편제상 병력이 90%밖에 안된 곳이 있고 어느 부대는 120%를 유지하기도 한다.

거기에는 각기 맞는 논리와 이유가 있지만 단선적인 시각으로 보면 편법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도 1개 부대에 50명을 둬야 할 것을 같은 인력으로 2개 부대로 편성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을 바로잡다 보면 자연 갈등과 충돌이 있었다. 윗선에서도 귀찮으면 “잘 납득시켜 봐!” 한마디로 책임을 나에게 전가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실 나는 육본 인력활용과장으로 발탁된 것에 많은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육본의 과장급(대령)은 육사5기에서 10기생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나는 10기생과 같기는 하나 현지 임관 출신이다. 이로 인해 고립감이 적지 않았다.

과장들 속에 끼기는 했지만 똑같은 과장이 아닌 것이다. 현지 임관 출신으로 과장을 한 것은 내가 첫 사례여서 이들을 대표하는 마음으로라도 나는 양심을 걸고 혼신을 다해 노력했다. 외롭기 때문에 더욱 원리·원칙에 투철하고, 그래서 상관으로부터 분명하게 일한다는 칭찬을 받은 반면에 “현지 임관 출신은 빡빡하고 융통성이 없다”는 비난도 동시에 받았다.

그러나 나는 정의감이 있었고 뒤늦게나마 대학에서 배운 현대 인사 관리 기법을 터득해 나름으로 이론 무장도 돼 있어서 자신감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 국군의 편제는 계속 비합리적·비효율적으로 이끌려 갈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계완 인력관리처장이 나를 불렀다. 인력관리처장실로 들어서자 이처장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생 끝에 희소식이오. 5사단 포병사령관 지명이오”하는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력 관리 5개년 계획도 거의 완성 단계여서 무거운 짐을 벗고 야전에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5사단장은 바로 조문환 장군이었다. 비둘기부대장으로 베트남 파병시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귀국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이 사단장으로 있었던 5사단장으로 발령 낸 것이고, 거기서 조장군이 나를 부른 것이다. 육본 시절 조장군을 잠깐 모신 것이 인연이 돼 귀국하자마자 나를 이렇게 불러 준 것이다.

물론 나를 발탁한 사람은 육본 기획처에서 함께 근무했던 최창주 대령이었다. 5사단 참모장으로 간 최대령은 육본 시절 나와 한때 ‘양최 대결’이라고까지 알려진 선의의 경쟁을 벌인 인물이다.

최대령은 전쟁 기획 장교로, 나는 연구 기획 장교로 이름을 날렸고, 그래서 대령 임관 때도 각축을 벌였다. 결국 그가 먼저 진급해 경쟁은 종지부를 찍었지만 누구보다 내가 더 축하해 주자 그 역시 잊지 않고 조장군에게 공석인 포사령관으로 나를 추천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육본 시절의 삼총사가 5사단에서 다시 뭉치게 됐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