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21>아, 가난한 군대 -116-

화이트보스 2009. 5. 20. 17:17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21>아, 가난한 군대 -116-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일부 장교·부사관의 영외 거주자들이 병사들이 먹어야 할 주부식을 유출하는 사례는 빈번히 일어났다. 이것은 모두 어려운 박봉 때문에 처자들과 먹고 살기 위해 부하 병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정량 급식을 편취하는 방법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는 직업 군인 처우가 보장되지 못한 데서 오는 부조리 현상이었다.

나는 간혹 서울에서 찾아오는 가족과 관사에서 숙식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부대에서 어떤 주부식도 받아먹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대개 충성스러운 부하 지휘관이 사령관을 생각한다고 몰래 가져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결국 그것은 국민의 아들인 병사들이 먹어야 할 몫이 아닌가. 그래서 아내는 부대에 오면 논두렁·밭두렁을 다니며 나물을 캐고, 산에서 더덕·도라지를 캐고, 텃밭에 쑥갓·배추·상추를 심었다.

나는 장교와 부사관·문관들이 퇴근할 때 휴대한 물건을 직접 조사·점검토록 조치했다. 처음에는 몇 명이 장난처럼 쌀과 된장·고추장·생선·야채를 반합이나 손가방에 봉지를 만들어 넣어 가지고 나가다 주임상사에게 들키는 경우가 있었는데 단속한 지 사흘이 지나자 위반 사례가 한 건도 없게 됐다. 그래서 1주일 만에 감독을 해제했다. 단속이 치사했지만 그렇게 군기를 잡아야 했다.

나는 사실 국방경비대 이등병 시절부터 배를 곯고 살아왔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막내아들인지라 고향에서도 배곯는 일이 일상사가 되다시피 해 군대 가면 배곯는 일은 없다는 말을 듣고 자원 입대했더니 더 허기지는 나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뚱이 속에 이만 한 주먹씩 들어 있고, 뱃속은 언제나 쪼르륵 허기진 소리만 나오고, 그래서 막연히 인생이 허무하고 무력해진 경우가 있었다. 젊은 나이에 배곯는 일처럼 슬프고 괴로운 일은 없다.

나는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일하고, 잠자라면 복종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아왔다. 그것은 장군이 됐어도 체질화돼 누구를 만나건 머리부터 수그리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겸손하다는 말도 들어 왔다. 그렇더라도 먹을 것을 못 먹고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날 때면 나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때 사기가 떨어질 것은 당연한 이치다.

언제나 어느 부대에서나 급식 부정, 군수 물자 부정 사고들을 보고 내가 허기진 이유를 알면서 어떤 배신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원한도 생겼다. 먹지 않고 싸울 수 없다는 것은 군대 급식의 기본이며, 이것은 만고의 진리다. 나는 이런 것을 생각하고 병사들에게 먹는 것만은 절대로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영내 부지에 밭을 일궈 고추·부추·배추·파·호박·상추 등 채소를 재배하고, 연못을 만들어 물고기를 기르고, 연을 심어 부족한 부식을 취하도록 했다. 냉장고가 없어서 야채나 두부는 며칠 안 가면 그냥 쉬게 된다. 그래서 취사장의 부식 창고 주변으로 산골 물이 돌아 흘러가도록 했다. 이렇게 하자 산골 물이 냉장고 구실을 해서 신선한 야채를 먹을 수 있었다.

병사의 90% 이상이 농촌 출신이기 때문에 취사 기구 만들기 경연 대회도 열었다. 나무뿌리로 바구니를 만들고, 짚으로는 멍석·꼴망태, 드럼통을 잘라 식칼·솥뚜껑을 만들어 남으면 주변 부대에 선물로 보냈다. 한국적 병영 생활을 만끽하도록 했던 것이다.

모든 군대 용어나 무기·군복·식기까지 미국식이었지만 사람은 한국 종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나는 군대 규정에는 없었지만 한국인의 생활의 지혜를 몸소 체험토록 한 것이다. 그 당시의 병사들이 가끔 나를 찾아와 그때가 달콤한 추억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평화롭게 군대 생활을 하고 있는데 1968년 1월21일 전군에 비상이 걸렸다.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공비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