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22>5분대기조-117-

화이트보스 2009. 5. 20. 17:17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22>5분대기조-117-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124군부대(무장공비 31명)가 휴전선을 넘어 산줄기를 타고 청와대 뒷산까지 쳐들어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철통 같은 방어망을 뚫고 대한민국 영도자의 집무실까지 이웃집 오듯 들어왔다는 것은 국토 방위 책임을 지고 있는 군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즉각 전군에 비상사태령이 내려지고 전방 각 부대마다 응징해야 한다는 보복의 목소리가 높았다. 우리 5군단도 대책본부를 설치하고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그러나 준비 없이 보복을 감행한다면 맨몸으로 불속에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김신조 일당보다 강력한 기동타격대를 편성·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포사령부 예하의 205포병대대장인 김영탁(포병간부·중령 예편) 소령을 불러 기동타격 소대를 특별 편성, 맹렬 단기 훈련을 실시토록 지시했다.

주요 훈련 과목은 소총 사격 전원 일등 사수, 수류탄 던지기 전원 40m 이상 투척(일반병은 20m 정도 투척함), 공용 화기(중기관총과 박격포·로켓포) 사격 능력 완비, 30분 내 야전삽으로 개인호 파기, 100m 15초 이내 달리기, 전원 태권도 유단자화, 급조 위장술과 전원 무전기 조작술 완비 등 10여 가지였다.

이는 실로 적을 일망타진하겠다는 결의에 찬 준비 태세였다. 개인 능력과 단체 능력을 90% 이상 끌어 올리는 데는 2개월반의 시간이 소요됐다. 마지막 점검을 하면서 한 달 더 마무리 연마를 하도록 하고 조문환 사단장에게 이를 보고했다.

조사단장은 두말없이 직접 자신이 예비 점검을 하겠다며 205대대 훈련장으로 차를 몰았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기동타격대의 훈련을 지켜보던 조장군은 무릎을 치며 “이만하면 됐다. 군단장님을 모시고 군단 시범을 보이겠다”고 말했다.

1968년 5월 초 군단 연병장. 군단장 장춘권(육사1기·군단장·소장 예편) 소장, 부군단장 정봉욱(현임·사단장·훈련소장·소장 예편) 소장을 비롯해 각 사단장, 군단 포병사령관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범 훈련이 실시됐다. 숨막히는 박진감과 넘치는 역동적 연속 동작, 매 종목 완벽한 시범이 나올 때마다 시범장이 떠나갈 듯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시범이 끝나고 간단한 연회가 있을 때 장군단장이 말했다.

“됐다. 이것으로 우리 군의 위축된 사기가 살아날 것이다. 1·21 사태로 군이 심리적으로 상당히 위축됐는데 이 정도면 124군부대를 때려잡을 수 있을 것이다. ”

이렇게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면서 “내 생전 군대 시범에 박수 쳐보기는 처음”이라며 나에게 노고를 치하했다. 이때 정부군단장이 나섰다.

“군단장님, 최갑석 대령은 만능 장교입니다. 모든 부대가 이런 장교 하나쯤 가지고 잘 훈련된 기동타격소대 하나씩 갖추면 북한의 어떤 도발, 기습 교란도 격퇴할 것입니다.”

장군단장이 파안대소했다. 그것은 정부군단장의 말에 동의한다는 표현이고 자신감이 넘친다는 웃음이었다. 정부군단장이 205시범대대장인 김영탁 소령을 불러 군단장에게 소개했다.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김소령은 군단장과 악수를 나누며 눈이 더욱 빛났다. 그는 용맹과 탁월한 지도력을 갖춘 장교였으나 애석하게 중령 예편으로 군문을 떠났다.

오찬 행사가 이어지는 자리에서 장군단장은 “1군사령부에 보고해 전군에 보급토록 하고 1군사 각 부대에서 시범 훈련을 견학토록 하라”고 즉석에서 지시했다.

이 훈련이 바로 후일 ‘5분대기조’라는 이름으로 전국 각 부대에 보급된 기동타격대 훈련 교범이다.

한편 군은 1·21 사태 직후 무장공비 일당에 대한 소탕 작전을 벌여 28명을 사살하고 김신조를 생포했다. 도주한 2명 중 한 명이 몇 해 전 남북 고위급 회담 때 서울을 다녀갔다는 소문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신조는 귀순해 남한에서 목회자로 활동 중이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