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가을. 우리 부대와 인접한 모 사단이 최전방 비무장지대(DMZ)에서 시계(視界)를 가로막는 무성한 초목 제거 작업을 실시한다며 내가 부대장으로 있는 5사단 포병사령부에도 일정 지역을 배당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 놓고 해당 인접 사단은 나서지 않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최전방의 모 사단을 지원하는 부대일 뿐 엄연히 5사단 예하의 포병사령부였다. 그래서 우리가 굳이 나서서 할 일은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지휘관 참모 회의를 소집했다.
“DMZ 지역은 가장 위험한 곳이다. 인접 모 사단도 겁나서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다. 적의 감제고지(瞰制高地)에서 최접적 지역인 데다 미확인 지뢰 지역이라 본관도 걱정하고 있다.”
작업 지역은 적과의 거리가 고작 200∼300m도 안 되는 곳이어서 기관총 유효 사거리 안에 있다. 크게 소리 지르면 적과 대화할 수 있는 지역이다. 실제로 일년에 수 차례 사격전을 벌여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는 곳이다. 대대장들의 얼굴이 어둡고 또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아 나 역시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악조건을 이유로 임무를 거부하면 인접한 모 사단에서 마땅찮아할 것이다. 반대로 이를 직속 상관인 5사단장 조문환 장군에게 보고하면 사단장의 성미로 보아 당장 부대를 빼라고 명령하며 인접 사단장에게 “왜 남의 부대를 험한 데로 끌고 들어가느냐”고 화를 낼 것이 뻔해 보였다.
나로 인해 두 사단장이 격돌·대립할 것이 너무나 명약관화해 보여 진퇴양난이었다. 이는 자칫 두 사단장의 자존심과 명예가 걸린 문제라 중간에서 잘못 처리하면 모두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미묘한 사안들이 군생활 중 얼마나 많았던가. 일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먹을 판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위험 지역에서 우리 부대의 희생이 따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때 미적거릴 수 없다. 양단간에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모두 잘 들어라. 시계 청소 작업을 우리 손으로 해치운다. 유효 사거리권 내에 초목이 우거지면 우리의 포 지원이 방해받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일을 하는 것이다. 남이 해 달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라. 두 사단장님께 이를 분명히 보고하겠다.”
그리고 군사용 지뢰 탐지기보다 민간 지뢰 탐지기와 민간 기술자를 고용토록 지시했다. 민간인이 탄피 등 고철을 줍기 위해 자작으로 개발한 금속 탐지기가 군용보다 성능이 훨씬 우수해 민간 기자재와 민간인을 고용하는 것이 더 나아 보였다.
내가 직접 지휘하기 위해 현장에 유무선상의 임시 지휘소를 설치하고 각 대대에는 4개조로 작업반을 편성·배치했다. 양쪽 고지에 기관총을 일부러 노출시켜 배치하고 무장한 병사들이 경계 태세를 펴며 무력 시위도 하면서 작업반들이 적 200m 앞까지 진출, 초목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최단 시간 내 작업을 끝내기 위해 초목 제거반을 지휘하는데 군목인 문원철(군종감·대령 예편) 중위가 갑자기 맨 앞에 나서서 작업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굳이 이 작업에 동원될 필요도 없고 최전방까지 나오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문목사, 왜 그러시오. 돌아가시오.”
“아닙니다, 사령관님. 병사들이 겁먹는데 제가 가만 있을 수 없지요. 이런 곳에는 제가 더 필요합니다.”
문중위는 “군목은 위험한 곳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병사들과 함께 있어야 하고, 고통받는 곳에 같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정신적 안정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가장 큰 기도”라고 말하곤 했다.
“특전사에서 특수 낙하산 훈련을 받을 때 장교들에게 배당이 왔는데 서로 나가기를 꺼리더군요. 그래서 제가 자원했지요. 낙하산 타기는 하나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맨 먼저 낙하산을 탔다는 별종 목사다. 그런 그가 제초 작업을 하다 말고 우뚝 서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총을 겨누고 작업반을 감시하던 북한군 병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총부리를 내려 놓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