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병사도 생소한 군목의 기도를 지켜보면서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무엇인가 갈구하는 것이 있구나 하고 감동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6·25전쟁 당시 미국의 바렌바크 기자가 쓴 ‘한국전쟁’ 르포에 군목의 활약상이 나온다.
군목이 미군 병사 수백 명과 함께 중공군의 포위망에 갇힌다. 그중에는 생사를 넘나드는 부상병도 다수 있었는데 중공군의 기습으로 지휘관·군의관이 모두 달아난 형편이었다. 그러나 군목은 남아서 죽어 가는 병사들의 손을 잡고 기도해 주고 다른 병사들에게 용기를 심어 주는 것이다.
바로 문원철 목사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베트남에 가서도 가장 적진 깊숙이 들어가 병사들을 돌보았다. 지금은 전남 여수의 순동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는데 그의 아들 문효빈 대위도 상무대 군목으로 시무하고 있다. 어쨌든 초목 제거 작업은 아무 탈 없이 말끔히 마무리 지었고 병사들도 모두 보람 있는 일을 했다는 뿌듯한 포만감으로 우렁차게 군가를 부르며 귀대했다.
1968년 11월. 전선은 벌써 삭풍이 몰아치고 추위가 엄습해 왔다. 나는 모처럼 철원군 신수리 5사단 포병사령부 관사에서 서울에서 온 아내와 함께 편안한 밤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따르릉 울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저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3사단장 최철(육사5기·관구사령관·소장 예편)이오. 지금 무장간첩 수 명이 23연대 CP를 습격해 연대장을 살해하려다 실패하자 초병을 쏘아 죽이고 달아났소!”
워낙 다급하게 말하는 통에 처음에는 잘 못 알아들었으나 잠시 후 엄청난 사건이 3사단 관내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벽시계를 바라보니 자정이 넘었다.
무장간첩들은 이날 낮 15사단 연대장을 길에서 매복, 저격했지만 실패하고 도주한 놈들인데 아마 피버(FEBA) 진지를 타고 다시 3사단에 침투한 것 같다는 것이 3사단장의 말이었다. 그리고 “당신네 포병부대 가까이 숨어든 것 같으니 그곳부터 경계를 강화하고 즉시 조치를 취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부랴부랴 전투복을 챙겨 입고 이웃에 사는 195포병대대장 이경석(포간·중령 예편) 중령에게 “대간첩 작전이다. 즉시 출동하라”고 지시하고 곧바로 195포병대대로 직행했다. 포사령부로 가지 않은 것은 23연대와 가장 가까이 있는 곳이 195대대였기 때문이다.
대대에서 지도를 펴고 간첩 침투로를 예상해 살펴보니 길은 딱 한 줄기였다. 무장간첩들이 23연대 CP로부터 경계망을 뚫고 탈출했다면 북쪽은 이미 차단됐고 큰 도로는 피해 나갈 것이고, 그렇다면 산길을 타고 195포병대대 쪽으로 이동(약 2km)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얼마 전 나는 195대대 외곽 지대를 순찰하면서 지형·지물을 익혀 놓았는데 진지 북방 탄약고 전방 500m 지점에 절개한 것처럼 움푹 파인 고갯길이 있었다. 틀림없이 무장간첩들이 그곳을 통과할 것으로 보고 나는 복초(複哨)를 편성, 배치했다. 그것도 베트남 파병 경험이 있는 귀국병을 지명, 배치했다. 그들은 현장 경험이 있고 담력도 있으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격 신호는 옆 초병 옆구리를 찔러 유효 사거리 내에 있을 때 일제히 사격을 가하라는 등 특별 수칙을 내리고 나는 곧 포사령부로 돌아왔다. 각 대대장들에게 진지 경계와 간첩 봉쇄 작전 요건을 내리고 있는데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참모가 전화를 받으려는 것을 내가 먼저 수화기를 집어들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95대대장입니다. 방금 사령관님이 지시한 매복 초소에서 간첩을 사살했습니다!”
나는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모두 사살했나?”
“두 놈 사살했습니다!”
“알았다. 내 지금 그리로 간다. 현장 확보를 잘하고 경계를 철저히 하라!”
나는 195부대로 지프를 몰았다. 밖은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이 둘러싸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