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49>600고지 전차 진지 구축-144-

화이트보스 2009. 5. 20. 17:27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49>600고지 전차 진지 구축-144-

PX 개선 작업이 말이 많으니 보안사도 감찰에 나섰다. 오자복(갑종·국방부장관·대장 예편) 보안처장이 직접 감찰에 나서 개혁 작업에 문제가 없는지를 살핀 뒤 내 손을 꽉 잡았다.

“전차 몇 대 사지 않아도 PX 개혁에 투자해서 군의 후생 사업 비리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조언한 것을 이세호 총장이 결단을 내려 추진하고 최갑석 장군이 흐트러짐 없이 제대로 실천한 거요. 장하오.”

1978년 10월 나는 이세호 참모총장을 방문, 소장 진급과 새 보직 신고를 했다. 총장이 파안대소하며 악수를 청했다.

“내가 사람을 잘 보았지, 잘했소. 수치스럽고 혐오스러운 PX 부정을 멋지게 추방했단 말이야. 35년 고질을 제거한 거요.”

PX 비리를 정리한 보람도 큰데 총장이 칭찬하고 또 소장 진급과 사단장 보직까지 받으니 몸이 둥둥 뜨는 기분이었다. 이등병에서 소장까지. 정말 생각해도 감격뿐이었다. 나는 이런 감정을 사단장 취임식에서 그대로 표현했다.

“나는 육군 이등병 출신입니다. 이등병이 소장이 됐으며, 분대장이 마침내 사단장이 됐습니다!”

그러자 열중의 장병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깨를 들썩거리거나 몸을 흔들고 있었다. 군인 특유의 동지적 전우애와 공감대가 발동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79 팀스피리트 한·미 연합 훈련 때의 일이다. 신현수(육사10기·중장 예편) 6군단장 지휘 하에 미2사단과 병진해 전술 상황상 춘천을 점령하는 공격 훈련을 감행했다.

나는 춘천까지 100리 행군을 독특한 행군 방식으로 이끌었다. 대개의 경우 20kg의 군장을 하고 행군하면 가다가 기진맥진해 목적지에 도달해서는 쓰러져 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행군이 아니다. 목적지에 도달해 시퍼렇게 싸울 수 있어야 진정한 행군인데 가다가 지쳐 쓰러지면 목적지에 죽으러 가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소대 단위로 고적대를 운영토록 했다. 하모니카와 피리를 불고, 북 치고, 기타 치고, 탬버린 치고, 군가 부르고 유행가도 부르고, 신명나게 걷도록 하는 것이다. ‘번호 붙여 갓’ 구령을 돌아가며 붙이도록 하면서 모두가 지휘관 맛도 보게 했다. 야외 소풍 가듯 즐겁고 신명나게 목적지를 향해 가니 낙오자 없이 맨 먼저 도착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것은 내가 창안한 것이 아니고 미국식 행군법이기도 하다.

79년 여름, 대전차 공격 축선 기동 진지 공사에 착수했다. 예산 한 푼 없이 험준한 바위산을 깎아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장비 부족으로 작업 진척이 되지 않았다.

나는 한미 1군단 공병대를 방문, 불도저 다섯 대를 빌려 왔다. 미군의 지원 결과 3개월 후 전차 통로가 완공됐다. 그런데 미군에서 계산서가 날아왔다. 장비 대여료·휘발유값 등 비용을 요구하는 명세서였다.

나는 한미1군단 공병대장을 찾아가 미군과 함께 전술 공사를 폈던 점을 역설했다. 공사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고 돌아왔는데 얼마 후 미 육군성 공병감사관(대령)이 대원을 대동하고 감사를 나왔다.

감사관은 공사 내역을 살피더니 “공사 설계도를 어디서 입수했느냐”며 “8사단의 대전차 공격 기동 축선 진지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설계도와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토군의 계획을 전혀 모르오. 나의 설계 영감은 내 경험과 저 건너편 국망봉에서 얻은 거요.”

어이가 없는지 육군성 공병 대령이 싸늘하게 웃었다. 이때 산에서 뻐꾸기 소리가 들려 왔다. 미군 대령도 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미국인은 저 새 소리를 어떻게 내는가?”

그러자 그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국키 국키”하고 소리를 냈다. 모두들 크게 웃었다. 수행한 다른 미군 역시 “국키 국키”하는 것이었다. 미군 대령이 나에게 물었다.

“당신네들은 어떻게 소리를 내나?”

나는 “뻐꾹 뻐꾹”하고 흉내 냈다. 그러자 그가 하하 웃으며 “아시아는 모두 그렇게 소리를 내느냐”고 물었다. 나는 일본인은 “각고 각고”하고 운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이 넘어질 듯이 웃어 젖혔다. 우리는 뻐꾸기 소리로 인해 서로 웃었고 이후 그는 공사의 공정성을 이해하고 오히려 더 물자 지원을 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