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노재현 참모총장이 나를 불렀다.
노총장은 국방부에서 군무 회의가 있었다면서 한신(육사2기·대장 예편·작고) 합참의장이 유럽 각국 군을 시찰하고 귀국 보고를 가졌는데 창피해서 못 다니겠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당신 어느 나라 군인이냐”고 물어 당당히 “한국의 합참의장”이라고 했지만 “한국의 합참의장이 미군 복장에 미군 계급장을 달고 다니는 게 이상하다”며 의아하게 바라보더라는 것이다.
“최장군, 이것 창피한 일 아닌가.”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막강 군대로서 말이 안 되죠. 우리 군의 복장과 계급장을 연구·개발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3군과 해병 합동으로 국군복제연구개선위원회가 발족됐다. 우선 장교 계급장과 복제·복식 개선 작업을 폈다.
1974년 12월 국방부 회의실에서 장군복 패션쇼를 가질 때 내가 모델로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이 패션쇼를 직접 참관했는데 내 앞에서 복장과 계급장을 만져 보며 “나도 우리 고유 계급장과 복장을 하고 싶군”하고 의미 있는 말을 했다. 그는 대통령이지만 정신은 여전히 군인이었던 것이다.
75년 3월 이세호 육군참모총장 부임과 함께 나는 인력관리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육군 인력 관리가 육군 제반 정책과 발전 소요에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널리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고 육군 사상 처음으로 인력상황실을 설치했다. 새 인사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인력 관리 기본 계획도 수립했다.
그런데 윤성민 참모부장이 급히 호출했다. 원호관리단장을 인선하던 중 총장이 나를 지명했다는 것이다. 나는 아차 했다. 원호관리단은 부정과 비리가 끊이지 않아 원호관리단장은 대부분 옷을 벗거나 구속되고 좌천되는 자리였다. 마침내 나도 옷을 벗으라는 것이구나. 그러자 전신의 힘이 쏙 빠졌다.
나는 집에 와서도 생각했지만 그곳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가라는 것인가. 그래서 다음 날 윤장군과 면담해 보직을 바꿔 달라고 간청했다. 이총장이나 윤참모부장은 베트남 전쟁 때 모신 분들이 아닌가. 사람 좋은 윤장군도 이런 인연을 알고 기다려 보라며 이총장을 면담하러 올라갔다. 그러나 밝지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화를 내셨소.”
그러면서 육군에 당면한 개혁 과제 중 PX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장군이 적임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총장이 각별히 임무를 부여한 뜻을 새기고 가슴으로 뜨거운 사명감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원호관리단에 들어가 보니 말 그대로 복마전이었다. 부임 당일 나는 일부러 소관 참모 회의를 소집했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흘 후까지 PX의 대표적인 문제점을 진실하게 적어 오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PX 이익금을 부대 운영비로 쓴다고는 하지만 도처에서 문제점이 발견됐다.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물품은 저질품에 비위생적인 것이 수두룩했다. 그것도 시중가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쌌다. 병사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도리 없이 이것들을 먹어야 했다.
업자들은 엉터리 제과류와 음료수·주류를 납품하면서도 당당했다. 뇌물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먹는 것 가지고 장난하는 업자들이 대로를 활보하며 떵떵거리고 산다는 것이 도무지 나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어린 병사들은 엉터리 빵을 사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고 있고, 배탈이 나도 항의 한마디 못하고 체념했다.
그런데도 장부상 대부분이 채무로 남아 있었다. 매월 각 업체의 채무 변제 요구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병사들로부터는 현금 장사를 하고 장부에는 채무로 돼 있고. ‘이것 큰일이다’라는 생각으로 나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