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1월 말. 육본 일직 사령 근무 명령을 받고 일직 사령실에 정위치하고 있는데 주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장군 진급 명단이 발표될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8년 대령을 달고 있는 나는 진급 후보에 오르기는 했지만 다음 해 계급정년으로 나갈 확률이 높았다. 기대는 했지만 장군은 실력과 능력 이 외에 또 다른 요인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속단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비밀 정보를 얻은 사람들이 풍문인지 첩보인지 탐문인지 누구는 되고, 누구는 탈락했다는 등 수선스러웠다. 거기에 나도 거명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발표 전야에 어느 선배는 진급했다는 소문을 듣고 진급 턱을 냈다가 다음 날 이름이 없어 결국 옷을 벗고 나간 경우도 있어 나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특히 인사참모부 소속이었기 때문에 경거망동은 더욱 용납되지 않았다. 예감은 나쁘지 않았지만 자칫하면 오해를 살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보좌관 당번들과 함께 먹을 수 있게 푸짐하게 음식을 장만해 보내도록 메모를 써서 운전병을 집으로 보냈다. 곧바로 아내로부터 살피듯이 전화가 걸려 왔다.
“무슨 소식 없나요?”
“모르겠는데….”
“여기저기서 축하 전화가 걸려 와요. 모르겠다고 해도 농담하지 말라면서 화를 내는 분도 있어요. 어찌된 일인가요?”
“글쎄, 모르겠는데….”
사실 이날 발표가 있는 날인데 서해안에서 무슨 사고가 발생해 참모총장이 갑자기 청와대에 가는 바람에 발표 날짜를 넘기고 있었다.
다음 날 오전 8시. 나는 일직 사령 이상 유무 보고를 하기 위해 인사참모부장실로 갔다. 백남대(육사5기·사단장·소장 예편) 부장이 표정 없이 “수고했소”했다. 인사 주무 장군인데 이런 말을 하니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데 뒤이어 “끝까지 대령 책무를 다하는구려”하는 것이다. 직감적으로 “됐다”고 확신했다. 순간순간 희비가 엇갈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없어 직무를 수행하는 데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전 10시, 인사참모부장 호출을 받고 갔더니 부속실에서 진급 담당인 김상언(종합7기·사단장·소장 예편) 인사관리처장이 결재판을 옆구리에 끼고 빙그레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주위에서 일제히 축하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부장실에 들어간 나는 전신으로 뜨거운 감동과 희열을 주체하지 못했지만 “영광입니다”하고 벅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침 식사도 거르고 점심이 지났어도 도무지 배고픈 줄 몰랐다. 인사 다니는 풍습대로 각 부장·차장·처장실을 찾아다니며 인사했다.
퇴근 후 집으로 가니 벌써 게딱지만 한 대문 위에 자식들이 만들어 놓은 장군 진급 축하 종이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집에는 친지·동료들로부터 별별 선물 케이스가 적잖이 와 있었다. 나는 이 중 별 한 쌍을 들고 아내와 함께 후암동 셋째 형님 댁에서 병환 중인 노모를 찾아갔다.
누워 있는 노모를 향해 아내가 “어머니, 애비가 이번에 딴 별이에요”하고 별 한 쌍을 손에 쥐어 드렸다. 어머니가 별을 한참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
“에구, 우리 막내가 별 하나를 따기도 힘든다는디 두 개씩이나 한꺼번에 따느라구 얼마나 고생했누?”
순간 나는 어떤 감격과 그동안의 설움이 복받쳐 눈물이 솟았다. 가난한 농촌 소년이 청운의 꿈을 안고 이등병으로 군문에 들어가 마침내 장군이 되고, 별 한 쌍을 보고 별 두 개를 딴 것으로 아시는 어머니, 만감이 교차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장군이 된 모습을 보시기는 했지만 열흘 후 세상을 떠나셨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 기자>
2004.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