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42> 군 인사 개혁-137-

화이트보스 2009. 5. 20. 17:24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42> 군 인사 개혁-137-

1972년 10월 육본 인사참모부 인사제도과장인 최창주 대령으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육본으로 갔더니 그는 상기된 얼굴로 동국대 학군단장으로 가게 됐다면서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내 제안이 하나 있소. 최형은 공평무사하니 군 인사 부조리를 척결하기 위해 민주적 인사 제도를 수립해 줬으면 하오. 나는 힘이 없어 물러나니 내 뒤를 이어 꼭 소원을 풀어 주오. 이렇게 되면 나와 네 번째 인연이 되는구려.”

나는 처음 의아했지만 그의 얼굴에 비장감이 감돌아 뭔가 일이 있구나 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나는 호국군 출신이오. 최형이 알다시피 호국군은 외롭소.”

그의 이 말은 장군이 되지 못한 한이 서린 넋두리였다. 군 인사 왜곡 현상을 척결해 보려 했지만 역부족으로 물러나게 되고 또 예편 대기조라는 학군단장으로 가게 되니 대단히 울적했던 모양이다.

우수한 육군대 교관 출신으로 성적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장군이 되지 못한다는 자괴감, 이로 인해 그는 끝내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다가 일찍 병사하고 말았다.

이런 일을 예감했던지 최대령의 부인이 나의 집사람에게 “공도 없이 헛고생만 하는데 바람 타는 자리에 뭣 하러 가느냐”며 만류했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러면서 “거지 같은 자리에 왜 가려고 해?” 하더라는 것이다. 부인도 남편이 장군이 되지 못한 불만을 그렇게 표현했으리라.

당시는 인사 관리의 폐풍이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8·15 광복에서 60년 장면 정권 시절까지는 일종의 군벌 시대였다. 그리고 5·16 이후에는 군 내부의 위계질서마저 파괴됐다. 5·16 가담자들이 전리품 챙기듯 군 요직을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특정 지역, 특정 학교 출신과 정치 군인의 등장으로 비리가 만연했다. 군 내에서 각종 동기생회가 활성화됐으나 일부 친목 도모라는 목적 이외에 집단 이기적인 자위책을 행사하는 조직으로 변했다.

이 기밀을 알아차린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군 내 파벌 조성을 근절하기 위해 각종 동기회의 수직적 조직과 세 확장 기도를 해체하는 단안을 내렸지만 오히려 역풍을 맞고 밀려나고 말았다.

그동안 공공연한 비밀이 돼 버린 대표적 결사체는 ‘하나회’였다. 이 모임의 비호 세력이 절대 권력층과 막강한 군부 요직자들이었음은 추후 정치 장교들의 행위인 79년 12·12 사태를 통해 여실히 볼 수 있다.

군 내의 자생 조직들이 이처럼 모집단인 국군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특정 조직에 가담하지 못한 군인들은 자조적인 비감에 젖기 일쑤였다.

본시 군인의 기본 덕목은 위국헌신과 멸사봉공이다. 여기에 투철하지 못한 것은 국가 경영상 백일양병 일일용병(百日養兵 一日用兵:오랜 기간 양병해 유사시 긴급하게 쓰는 병사)이라는 국방 요결을 터득하지 못한 데 있었다.

군은 국가 유사시에 대비하도록 항재전장(恒在戰場:항상 전투하는 곳에 있다는 자세) 개념을 주입시켜 적을 섬멸·격퇴하는 정신을 길러 줘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떠나 병영에 사는 그들에게 후고(後顧)의 염, 즉 인사, 생계, 사상자 처리와 사회적 예우 보장책을 세워 공평하게 시행해야 한다. 여기서 더욱 강조되는 것이 인사다. 인사는 만사인 것이다.

이승만·장면(윤보선) 정권이 군 인사 잘못으로 실정하기에 이른 것이 바로 좋은 예일 것이다.

어쨌든 군 인사의 적폐를 시정하려다 최대령은 밀려나고 대신 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동안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실태를 파악해 보니 엽군(獵軍) 운동·부조리·정실 인사로 군 기강은 해이해진 상태였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