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40>학군단장 차가 세단-135-

화이트보스 2009. 5. 20. 17:23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40>학군단장 차가 세단-135-

나는 2군사령관 채명신(육사5기·전 주월사령관·중장 예편) 장군이 서울의 각 대학 학군단장들을 위로하기 위해 주재한 회식 석상에서 마침 잘됐다 싶어 정중히 건의했다.

“학생 시위가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군용차 때문에 애로가 많습니다. 학생들이 군용 지프를 보고 대학 캠퍼스가 병영이냐며 항의하고, 또 고물 연막차를 끌고 다니다 보니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학군단장 차를 세단으로 교체해 주었으면 합니다.”

다른 학군단장들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듣고 있던 채사령관이 호의를 보였다.

“음, 명색이 학군단장인데….”
군 내부에서도 지적·학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채사령관의 이런 호의는 뭔가 숨통이 트일 것 같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며칠 후 육군 정책 회의에서 급히 육본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회의장에서 정책 회의의 한 위원(소장)이 ‘세단 승용차’건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다른 위원이 들을 것 없다면서 대뜸 말했다.

“야, 네가 세단차를 달라고?”
나는 순간 주춤했지만 물러서면 안 된다고 판단, “설명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들을 것 없어. 육본 장군들도 학고차(하꼬방차의 준말)를 타고 다니는데 건방지게 대령들이 세단차를 타겠다고? 어디 타 봐!”완전히 나를 골탕 먹이겠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논리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대학 내에서는 교련 반대 시위가 격화되고 있습니다. 군의 위상을 높이려면 연기 나는 데다 운행 중 운동장에 서 버리는 차보다 세단을 지급하는 것이 좋다고 건의합니다. 대학에서 우리 군도 선망의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제서야 위원 한두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위원이 말했다.“대학에서 군이 거지꼴을 보여서는 안 돼. 줍시다, 줘.”순식간에 찬성 분위기로 돌변했다. 이렇게 해서 각 대학 학군단에는 새나라 세단이 지급됐다. 그 차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대학의 학·처장은 물론 교수들도 빌려 달라고 요청해 와 편의를 제공하는 수준까지 갔다.

전국에 차가 10만 대가 되지 않던 시대이고 또 대학 총장이나 타는 세단을 학군단장이 타니 당장 보는 눈이 달라졌다. 일부 교수는 자녀들의 혼례 차량으로 빌려 갔고 사무처에서는 사적으로 쓰는 만큼 휘발유를 댔다. 불과 3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이런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1963년 중령 때 현지 임관 동우회장에 추대돼 71년까지 맡고 있었다. 학군단장으로 오니 옛 전우들이 현지 임관 전사자 추념비를 세우자고 제안해 왔다.

현지 임관 전사자들은 이름도 없이 조국 산하에 묻힌 젊은이들이다. 17세에서 20세 미만의 소년병 출신이기 때문에 총각귀신들이고 늙은 부모가 세상을 떠나니 누구 하나 제사를 지내 주는 사람도 없다. 나라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바친 이들에 대한 대접이 너무나 허술한 것이다.

현지 임관 출신이 힘이 없으니 현지 임관 출신 이외에는 누구 하나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동우회장 자격으로 추념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일에 착수했다. 전우들이 성금을 보내 주는데 어려운 처지에도 금방 목표액을 초과 달성했다.

이 뜻을 조각가인 김세중 서울미대 학장에게 설명했더니 감동한 나머지 무료 설계를 약속했다. 부인인 김남조 시인도 내가 기초한 헌시를 다듬어 주었다.이 사실을 김상룡·정영조 추진위원과 함께 서종철(육사1기·국방부장관 역임) 육군참모총장을 방문해 보고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