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39>여대생 명예 학군단-134-

화이트보스 2009. 5. 20. 17:23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39>여대생 명예 학군단-134-

내가 여대생들을 대상으로 명예 학군단을 창단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학군단 후보생들이 이상스럽게도 여대생들로부터 인기가 없다는 데 기인했다.

미국의 경우 학군단 후보생 출신은 언제나 결혼하고 싶은 남자 상위 랭킹에 오르는데 한국은 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시 서울의 각 대학은 후보생들을 간신히 채울 정도였다.

여대생들이 찾아오자 나는 그들에게 다과를 베풀고 학군 장교의 장점을 강조하고, 이들이 확고한 사회 신분으로 활약하게 될 것이니 믿음직한 신랑감이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때서야 여대생들이 크게 관심을 보이며 동참 의사를 보였고, 나는 이들 30명을 확보해 여대생 학군단을 창단했다.

육군에 건의해 단복과 모자 지급을 지원 요청했더니 전례가 없는 데다 학교의 사적인 일이며 예산도 없다면서 거부했다. 그래서 겨우 명찰 하나 달아 주는 것으로 그쳤지만 후보생들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대학 축제 때 이들이 어렵지 않게 파트너를 구하는 결실은 보았다.

유신 반대 데모가 격화되던 어느 날, 학생들이 경찰의 시위 진압 버스에 돌을 던져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경찰이 캠퍼스로 들이닥치더니 학생들을 진압봉으로 구타하고 마구 최루 연막탄을 뿌려 댔다.

학군단 사무실에도 호스를 연결해 최루 연막 가스를 뿌려 댔다. 나는 간신히 장교 손을 잡고 사무실을 빠져 나왔으나 눈물·콧물·재채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본관 쪽에서도 학장·교수들이 코와 입을 막고 뛰쳐나왔다.

나는 분통이 터져 지휘 중인 청량리 경찰서 간부를 불러 세우고 고함을 질렀다.

“이 바보 먹통 같은 놈들, 학생들은 다 가고 없는데 애꿎은 학군단과 교수 연구실에 최루 가스를 뿌려? 그리고 왜 학교에 무단 진입했나? 이렇게 포악하게 진압하니까 주민·교직원 모두 너희들을 욕하지!”

이때 교정에 진주한 특전사 대대장도 켁켁 기침을 하며 달려왔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군대가 대학에 진주해 있는데 경찰이 멋대로 들어와 난동을 피워? 앞으로는 허가 없이 대학 내에 들어오면 모조리 쓸어버릴 거야!”

경찰은 학생들이 던진 돌과 화염병에 버스가 불탄 데다 동료 경찰이 부상하자 홧김에 캠퍼스에 들어왔다고 양해를 구했지만 진주한 군대와 전혀 호흡을 맞추지 않은 감정적 처사였다. 당시 이런 과잉 진압으로 많은 말썽이 발생했다.

군대는 캠퍼스에 진주했지만 교수진·학생들과 별다른 마찰 없이 지냈다. 그들을 자극하지 않고 묵묵히 임무를 수행해 신뢰를 쌓았다.

어느 날 박술음 학장이 급히 보자는 연락이 와 학장실로 올라갔다. 박학장이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학군단장, 이리 오시오. 저 광경 한 번 보시오.”

창밖 운동장을 보니 장교 1명과 조교 1명이 학생 하나를 앞에 두고 총검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저렇게 한 명을 앞에 두고 교련 보충 훈련을 시키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났소. 어찌된 일이오.”

“네, 교련 참가자가 극히 저조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참가하면 교육을 시키라고 지시했습니다.”

“사실 교육이란 많은 사람을 얕게 교육하는 게 아니라 적은 사람을 깊게 하는 것이오. 저런 교육은 우리 대학이 사야겠소.”

박학장은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하긴 내 아들도 이 대학의 ROTC 후보생이다. 그들은 모두 내 아들인 동시에 나라의 동량들이다. 어찌 그들의 이상을 정치의 모순에 결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답답한 마음을 갖고, 그러나 제도가 요구하는 범위 안에서 그들의 자유를 신장할 수 없을까 고심했다.

그런데 교련 반대 시위대 중 일부가 캠퍼스의 군용차를 공격할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더군다나 학군단장 차가 고물이어서 툭하면 시동이 꺼졌다. 그래서 후보생들이 밀고 끌고 하는 데 웃음거리가 됐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