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43> 기존 인사 규정 하자 투성이-138-

화이트보스 2009. 5. 20. 17:25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43> 기존 인사 규정 하자 투성이-138-

군사령관급 장성이 이동할 때는 전에 데리고 있던 부하들을 집단으로 데리고 다니는 폐단도 있었다. 많은 인력을 끌고 다닐수록 힘 있고 실력 있는 장군처럼 비친 것도 당시 풍조였다. 이런 이들의 위세는 대단했고 그런 연줄에 있지 않은 군인들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직무를 수행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군 인사법은 1962년 1월20일 이미 제정·공포되고 2월에는 시행령까지 나와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실천되지 않아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본래의 군 인사법 정신인 공정의 원칙, 기회 균등의 원칙, 능력 본위의 원칙을 구현하기 위해 새로운 제도를 수립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역점을 둔 것은 ‘모든 장교는 임관 구분에 의한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조항을 철저히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한편 최창주 대령이 왜 실패했나를 살펴보았다. 좋은 법 정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왜 실패하고 물러났을까. 그것은 방법론상의 문제라는 결론을 얻어 냈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해도 대중적 공감을 얻지 못하면 실패할 수 있다. 최대령은 이 부분을 간과한 것이다. 나는 새로운 인사 제도를 만들어 각 군에서 설명회를 갖기로 했다. 설명회를 통해 공평무사한 인사 정책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고 건의 사항을 받아들여 반영하면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하리라. 나는 이 같은 계획을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하고 승낙을 받아 냈다.

나는 곧 불합리한 군 인사의 대상을 골라 냈다. 가장 큰 문제는 불문율로 돼 있는 각 군 주도의 지휘관 분권화 운영이었다. 사실 1, 2군 사령관이 분권화 운영의 핵심이었다. 그들은 육본의 통제 밖에 있는 것이다.

보직 기간도 없이 장교들을 빼고 넣고, 짧게는 2~3개월에 한 번씩 전·출입하는 인사 파행이 나타났다. 지휘관 추천 서열로 진급하고, 그것도 진급 절차인 교육을 생략했다. 이른바 선진급 후(형식적)교육의 파행이다.

다음으로 20개 병과 중 보병 병과 위주, 즉 전투 부대 위주로 인사 특혜가 편중됐다. 이로 인해 본래의 편제상 요구되는 제 병과 기능 발전이 저해되고 있었다.

셋째, 창군기의 군벌·파벌과 좌우 이념이 상극하는 과정의 중상모략이 왜곡된 인사의 기준이 돼 이를 매개로 지연과 연고, 정실 인사가 비선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사실 6·25전쟁 때 잠시 능력 위주의 발탁 인사가 있었지만 5·16 주체 세력이 인사권을 장악한 이후 기존의 위계질서가 파괴되고 개개인이 진급 운동을 펴는 연고 지휘관 찾아 가기, 이권직(돈 생기는 곳) 운동 등이 횡행했다.

특히 인사의 표준적·객관적 통일 기준이 적용되지 않은 풍토를 최대로 악용, 금품이 거래되는 등 인사 군기가 문란해져 있었다.

나는 이런 적폐를 근거로 ‘장교 인사 관리 합리화’라는 문서를 만들어 노재현(육사3기·국방부장관 역임)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했다. 이때 나온 것이 육군 정책 지침 2호다. 노총장은 나를 앞에 세우고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까지의 인사 관리 규정은 하자 투성이다. 이것을 백지로 돌리고 소위 임관시부터 선교육 보직, 진급을 직능별로 분배해 인사 군기를 바로잡도록 하시오.”

나는 참모총장의 결의가 단호하다는 것을 알고 정면 돌파하기로 다짐했다. 최대령과 같이 도중 하차할지라도 인사 정의를 반드시 세우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인사 관리 표준을 만들기 위해 부하들에게 일을 분담시켰는데 보직 분야는 이호복 중령, 진급은 김대곤 중령, 교육은 박종성 소령, 근무평정 분야는 박순영 중령에게 맡겼다.

72년 11월부터 73년 11월까지 매일 토의식 회의를 주관하며 조문을 만들었는데 새로 탄생한 인사 제도는 크게 10개 항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