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46>인사근무처장 시절-141-

화이트보스 2009. 5. 20. 17:26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46>인사근무처장 시절-141-

군문에 들어가 15개의 계급장을 단 지 27년 만에, 6·25전쟁 때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등 세 차례나 사선을 넘은 끝에 나는 마침내 장군이 됐다.

선물로 들어온 별 계급장을 만져 보며 나는 군대의 꽃인 별을 단다는 것이 역시 장교들이 한 번은 꿈꾸어볼 만한 가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알았다. 장군이 되면 30여 가지의 변화가 있다고 했는데 당장 정복과 예복이 주어지고 단화·반장화·가죽 요대·리볼버 권총, 그리고 승용 세단이 지급됐다. 한마디로 놀라운 변화였다.

1974년 1월3일 장군으로 첫 출근하는 날 나는 일찍 일어나 정좌하고 스스로 행동 강령을 먹을 갈아 붓으로 썼다. 첫째 청렴, 둘째 수범, 셋째 인화단결이라고 썼다. 만군은 장군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것인 즉, 무엇보다 수범과 덕망이 요구된다. 그중 인화가 중요하다. 소년 시절 서당에 다니면서 배운 것 중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는 것이 있었다. 지리나 천운(天運)보다 인화가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나는 이를 철저히 지키자고 마음속으로 다졌다.

나는 인사근무처장 발령을 받았다. 인사 제도를 입안했으니 그 실무를 직접 챙기라는 지시로 받아들였다.

인사근무처 임무는 군 사기와 복지, 군법 질서 유지, 사법 제도와 포상, 복제와 복식, 전사와 사망자 처리, 전역과 제대자 처리, 사회 신분 보장 등 광범위하고 다양한 업무였다. 현역 55만 명, 방위병 10만 명, 향토예비군 300만 명에 대한 관리인데 대집단인지라 언제나 각종 사건·사고로 긴장된 분위기였다.

어느 날 결재판을 들고 노재현 참모총장실에 갔더니 노총장이 신문을 보다 말고 화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최장군, 이것 보게. 우리 군대가 이렇게 나약해서 되겠나?”

신문에는 동두천발 서울행 버스 안에서 깡패들이 승객에게 행패를 부렸는 데도 함께 타고 있던 젊은 장병들이 제지하거나 말리기는커녕 고스란히 당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렇게 의협심이 없어서야 어찌 군인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러면서 우리 군대가 왜 이렇게 됐나를 분석·보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조사해 보니 보안상 이유로 부대 마크를 없앤 것이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말하자면 소속감이 없었다. 부대의 명예나 자부심은커녕 여기저기서 행패를 부리는 사례가 많이 적발됐다. 당시 병사들에게 휴가비가 지급되지 않아 도처에서 무임승차 시비가 붙고 신분을 밝히는 표지가 없으니 더욱 멋대로 굴고 있었다. 그래서 부대 마크를 다시 부착하고 복식과 복지 문제를 보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면 그렇지.”

노총장은 곧바로 부대 마크 부착을 전군에 지시했다.

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 동포 북한 공작원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다 옆 자리의 육영수 여사를 피격, 사망케 한 사건이 발생했다. 전군에 비상이 걸리고 10월1일 국군의 날 행사를 치러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고민하게 됐다. 북한이 언제 어느 때 침투해 박대통령에게 위해(危害)를 가할지 불안하고, 또 이런 위기 때 마땅한 제병지휘관이 없다는 걱정들이었다.

나는 이런 때일수록 더 화려하게 치러야 한다며 제병지휘관으로 조문환 장군을 추천했다. 조장군은 당시 수도군단장으로 복무하고 있었지만 ‘기합대장’이라는 별명대로 엄격하게 군을 지휘하는 용장으로 널리 알려진 장군이었다.

나의 건의대로 조장군이 제병지휘관이 돼 행사를 과시하듯 더 크게 치르게 됐다. 육·해·공군과 해병대 파견관을 배석시킨 가운데 공군은 초계 비행을, 해군은 인천 서해 바다를 물샐틈없이 뒤지고, 특전사는 한강 하구를 봉쇄해 수중 탐색을, 포병은 보병을 지원할 수 있도록 만반의 화력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하고 행사장은 3중으로 방어망을 치고 여의도 광장에서 국군의 날 행사를 성대히 치렀다.

이는 대통령을 지킨다는 의미도 있지만 국민과 군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고, 유사시 수도를 사수하고 적을 격퇴한다는 훈련을 병행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 행사를 계기로 대통령이나 국민은 침울한 일상에서 벗어나 활발히 활동하는 계기가 됐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 기자>

2004.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