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26일 밤. 사단에 왠지 찜찜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서부 지역에 진돗개 비상이 걸렸다느니, 전군이 지금 비상 대기에 들어갔다느니 하는 아리송한 첩보가 전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 10시쯤 최영구(육사7기·군사령관·군수사령관·중장 예편) 군단장이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 왔다.
“지금 서울에 무슨 이상이 있는 것 같소. 하지만 8사단장은 내 목소리를 확인하지 않고는 절대로 병력을 움직이지 마시오.”
“적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움직일 수 있습니까.”
“그러니 절대로 내 말이 아니면 (병력을) 움직이지 마시오.”
이 말을 남기고 최군단장은 전화를 끊었다. 궁금증이 생겼지만 나는 전 부대에 비상 대기를 명하고 헌병대장을 불러 경계병을 증가, 배치토록 했다. 사단장의 명령 없이는 누구를 막론하고 통행을 금지하라고 지시했다.
새벽녘이 되자 청와대 ‘코드 1’이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코드 1은 박정희 대통령의 암호 명칭이었다. 27일 오전 10시가 지나서야 박대통령이 시해되고 범인이 김재규며 전국에 비상 사태가 선포됐다는 발표가 나왔다.
정오쯤 군단장으로부터 군단 CP로 급히 오라는 연락이 왔다. 군단 CP에는 부군단장 김복동(육사11기·육사 교장·중장 예편) 장군이 배석해 있었다. 최군단장이 나에게 물었다.
“8사단장, 각하 유고인데 앞으로 정국이 어떻게 될 것 같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방면에 관한 한 나는 무지했던 것이다. 그러자 군단장이 김 부군단장에게 물었다.
“김장군, 이거 육사 출신들이 뭐 하려고 하는 것 아니오?”
그러자 김 부군단장이 정색하며 “그럴 리 없다”고 잘라 말했다. 어떤 예감이 뇌리에 스쳐 지나가 내가 나섰다.
“아마 (육사)11기 이전 군 선배들은 모두 물러나게 될지 모릅니다.”
나의 이런 직관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분명히 말했다. 그러자 김 부군단장이 “절대로 육사 출신들이 선배들을 몰아낼 리 없고 그럴 계획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고 단언하듯 말했다.
나중에 알려진 것이지만 김 부군단장은 대구 출신이기는 해도 ‘하나회’ 출신은 아니었다(후일 김복동 장군은 육사 교장으로 있을 때 전두환 장군이 집권 의사를 밝히자 “육사 출신들이 참모총장하러 군에 왔지 대통령하려고 온 것은 아니잖나”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80년 1월 10·26의 여파로 군 주요 인사가 단행돼 나는 육군작전참모차장 겸 항공감으로 전보됐고 81년 1월 신임 이희성 육참총장이 자신을 도와 달라고 요청해 감찰감으로 전보됐다. 그리고 82년 3월 예편 대기직이라는 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됐다.
대구 2군사령부에 도착하니 차규헌(육사8기·군사령관·대장 예편) 사령관이 깍듯이 나를 영접하고 “부사령관 각하, 우리 함께 서로 이해하면서 경험과 지식을 2군사에 모두 남기고 떠납시다”라고 인상적인 환영의 말을 했다.
나는 며칠 후 대한중석 사장으로 근무 중인 군 선배 한신 사장을 방문했다. 한사장은 나를 맞더니 직선적인 성격대로 “여보, 부사령관. 부(副)자로 잘못 왔소. 副자는 할 일도 없고 시키는 일도 없으니 낮잠만 자는 자리요”하고 안됐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나도 “미군은 군대에서 세 가지가 불요지물(不要之物)이라고 했는데 하나는 허위 보고요, 둘은 맹장이요, 셋은 부지휘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야죠”하자 한사장이 “그래, 마음 편히 먹어”하면서 손을 굳게 잡아 주었다.
83년 10월 나는 계급 정년과 근속연령 정년이 동시에 도달해 31일자로 전역 통보를 받았다. 전역식은 10월30일 군사령부 연병장에서 열렸다. 전 관구사령관을 비롯해 예하 사단장, 육본 직할부대장, 경북지사, 대구시장 등 귀빈과 셋째 형님 등 가족·친지들이 참석했다.
분열과 사열, 15발의 예포를 받으며 36년 10개월 22일의 군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식이 진행되자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이윽고 식이 끝나고 군사령관이 현관까지 배웅하는 가운데 나와 아내가 탄 승용차가 사령부를 떠났다. 장병들이 길 양쪽에 도열해 박수로 환송하고 승용차가 정문을 벗어나려 하자 나도 모르게 차에서 내려 사령부 본관을 바라보았다.
사령부 중앙 국기 게양대에서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보자 문득 50년 9월 전쟁 중 김화 전투 때 적의 총탄을 맞고 서울 순화병원으로 후송돼 바라보던 태극기가 떠올랐다. 수혈을 받지 못한 채 거의 주검 상태로 병원 마당에 팽개쳐져 있었는데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눈을 뜨자 바로 머리 위 국기 게양대에서 태극기가 푸른 창공에 휘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 나이 스물한 살, 나는 그 태극기를 바라보며 한없이 울었다.
그 태극기가 지금 선명히 펄럭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국기를 향해 경례를 붙였다.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나는 속으로 외쳤다.
“태극기여, 영원하라.”
제3화는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장지량(張志良·예비역 중장) 장군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남기고 싶은 그때 그 이야기’ 제2화 ‘격동의 세월, 장군이 된 이등병’이 오늘 145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격동의 세월…’을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남기고 싶은 그때 그 이야기’ 제3화는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장지량(張志良·예비역 중장) 장군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의 애독을 바랍니다. 〈편집자〉
2004.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