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지 아프리카, 특히 한국과는 너무나 멀리 있는 대륙. 이곳에서 한 건 한 것이 그토록 우리 외교 역량을 과시할 줄은 몰랐다.
군 출신으로서 외교관 생활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그래서 주요 장성이 퇴역하면 시혜 차원에서 대사 자리 하나 주는 것쯤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딱딱한 병영생활을 해 온 군인이 사람과의 소통을 기본으로 하는 부드럽고 유연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 외교관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그런 인식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사람을 상대하고 이끄는 것은 군생활이나 외교관 생활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둘 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다루는 일이다. 어떤 제도, 법리보다 사람을 알아야 하고 상대방과 가슴을 열어 놓는 진실한 대화가 중요하다. 나는 어느 자리에서건 이 점에 충실해 왔고 늘 진정성이 묻어나도록 일했다. 그런 면에서 외교관 생활이 군생활의 연장일 수 있다고 나는 늘 강조한다.
김용식 장관이 일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날 나에게 물었다.“장대사의 업무 능력은 여러모로 귀감이 됐소. 곧 에티오피아 대사 임기가 끝나 가는데 다음 후임지를 생각해 봤소?”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 없이 지내왔다.
“아직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저런, 그럼 내가 하라는 대로 하시오. 필리핀 대사로 가시오. 내가 수년 전에 대사로 일했던 곳이오. 아주 좋은 곳이야.”
그러면서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북한을 받아 주지 않는 유일한 나라이며 6·25전쟁 참전국으로서 맨 먼저 파병해 준 나라라고 소개했다.“장대사가 가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날 것이오.”
내가 외교관 생활을 시작할 무렵 대사 자리가 네 군데 났을 때 그중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에티오피아에 가겠다고 하자 외무부가 의아하게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셀라시에 황제와의 인연이 있기는 했지만 그곳은 누구나 기피하는 곳이고 너무나 우리에게 낯선 곳이었다.
그러나 나는 교묘하고 비정상적인 정보망을 가동, 비방·음해·모략·배척 등 사람을 제대로 키우지 않는 풍토가 환멸이 나서 한국 사정이 가능한 한 많이 격리된 곳이 좋다는 생각을 하고 에티오피아를 선택했다. 정말 한국 생활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고 지치게 했다.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적과 적의 관계가 유지되는 곳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심성이 다치지 않는 곳을 찾아 에티오피아를 선택했는데 다행히 성과물까지 얻게 되니 보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사람은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1972년 한국은 비동맹 회원국 중에서 유일하게 유엔 창설 이래 23년 만에 에티오피아 표를 확보하면서 북한과의 외교전에 우월적 위치에 한발 다가설 수 있었다. 사실 아프리카는 북한의 지지표가 더 많았고 북한 역시 많은 외교 역량을 이곳에 쏟아 붓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곳을 비집고 들어갈 틈새를 마련했다는 것이 우리 외교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셈이다.
73년 6월 나는 근 4년의 에티오피아 대사 생활을 청산하고 필리핀 주재 대사로 임명돼 마닐라로 날아갔다. 마닐라에 도착하고 보니 마침 국경일 휴일이 연이어 있어 곧바로 신임장을 제정받지 못하고 보름이나 지나서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받았다. 뒤이어 부통령 접견실로 안내돼 나이 지긋한 로페스 부통령을 면담했다. 부통령은 나를 맞자마자 반갑다고 손을 내밀면서 정중히 말했다.
“한국 대사께 꼭 충고 하나 해 줄 것이 있습니다.”나는 신임 대사에게 충고한다는 말에 마음속으로 놀랐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