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제3話 빨간 마후라 -112- 로페스 부통령의 충고 | |
외교 관례상 초면에는 대개 의례적인 인사와 덕담을 하는 것이 순서인데 로페스 부통령은 상당히 파격적인 발언을 했다. 부통령은 설탕 공장 등 유수한 회사를 갖고 있는 필리핀의 대부호였지만 국민적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다. 마르코스의 독재가 강화되고 국민적 저항과 선진국의 비판이 일자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이를 설득해 부통령 자리에 앉혀 놓았는데 바로 그 인물이었다. 나는 바짝 긴장하고 무릎을 곧추세우며 부통령을 바라보았다. “각하, 제가 일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으니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의 헌병 중에는 한국인이 많았소. 이들이 필리핀 국민을 가혹하게 했습니다.”그는 내가 일본 육사 출신이고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경력을 미리 파악해 뒀던 모양이다. 부통령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때 필리핀인들이 기다란 섬인 팔라완 섬 끝에서 끝까지 500㎞를 도보로 끌려갔는데 두 달 동안 먹이지 않고 때리고 하다 보니 거의 다 죽었소. 그래서 일본에 대한 감정 못지않게 한국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소.” 한마디로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일본을 위한 전쟁이 아닌가. 더군다나 식민지 조선도 필리핀과 똑같이 그들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운명이 아니었던가. 부통령의 말이 이어졌다. “인간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그때 정말 인간이 저토록 비정한가를 봤는데 한국에서는 광복(1945년 8월15일) 직후 이승만 박사까지 나서서 홍사익을 구제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소.” 홍사익 장군은 필리핀에 있는 최대 규모의 일본군 태평양 포로 수용소장이었다. 그곳은 남양 군도에서 포로로 잡힌 미군을 비롯해 필리핀·대만·중국·자바·말레이시아 군인들을 가둬 놓고 가혹 행위를 했다는 악명 높은 수용소였다. 일제 때 한국인 출신으로 일본군 장성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한 사람은 영친왕이고 다른 한 사람은 홍중장이었다. 영친왕이야 정책적으로 주어진 직책이고 반면에 일본 육사 출신인 홍중장은 탁월한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일본 최고위급 장성이 됐으며 전쟁 말기 태평양 포로 수용소장직을 맡고 있었다. 광복 직후 이승만 박사는 홍장군의 구명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외교 채널을 가동하고 우방국의 지원을 요청, 맥아더 사령부에 구명 탄원을 했지만 그는 A급 전범으로 처리돼 끝내 처형됐다. 이 같은 단죄는 필리핀의 민심도 반영됐음을 부통령의 발언에서 느낄 수 있었다. “팔라완 섬 등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에 대한 감정이 나쁘니 유의하시오.”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인 데다 전임자로부터 어떤 정보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더 긴장됐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부통령의 그 발언은 대단히 고마운 말이었다. 의례적인 인사에 비해 얼마나 속 깊은 얘기인가. 이럴수록 겸허하고 주재국의 과거 역사도 더듬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필리핀 대사 시절 일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어느 날 마카파갈 전 대통령으로부터 골프 초청을 받았다. 마닐라 근교의 그림 같은 골프장에 들어서니 마카파갈은 물론 전 외무장관 라모스 1세(라모스 전 대통령의 부친), 푸야트 전 상원의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필리핀의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현직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국민적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미국이 민주주의를 수출, 대표적으로 성공한 나라가 필리핀인데 바로 이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주인공들이었다. 이후 나는 이들과 팀을 만들어 매월 한 차례씩 라운딩했다. 라운딩을 마치면 마카파갈 전 대통령의 사저로 가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정원수 밑에서 식사하면 대통령의 딸이 차를 날라 왔다. 깜찍하고 귀엽고 예쁜 대학 1년생쯤 돼 보이는 이 여학생이 바로 현 필리핀 대통령인 아로요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1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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