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363>제3話 빨간 마후라 -113- 로물로 장관과 나

화이트보스 2009. 5. 27. 21:02
<363>제3話 빨간 마후라 -113- 로물로 장관과 나

아로요 양은 체구는 자그마하지만 총명한 눈을 빛내며 아버지의 친구들을 영접했다. 다부지면서 활달하고 예의가 깍듯한 그 모습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점쳤는데 지금 대통령으로서 필리핀을 이끌고 있다.

지난번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총회 때 부산을 방문한 그녀를 만나지 못했지만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몇십 년 만에 해후하면서 짧으나마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눴다. 아로요 대통령은 여학생 시절 나를 영접한 일을 떠올리며 “아버지 친구”라며 반가워했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한·필리핀 친선협회 회장직을 10년 넘게 수행해 오고 있다. 그만두려고 하지만 전·현직 대통령 등 필리핀의 지인들이 “이것만은 종신직”이라며 사임을 한사코 만류했다.

라모스 전 대통령도 외무장관을 지낸 아버지와의 친교를 고마워하며 한국을 방문하면 꼭 나를 찾는다. 이처럼 외교관 생활은 상대국 지도자들과 교류를 증폭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그것이 외교관 인생의 큰 자산이자 자원이 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로물로 전 외무장관이다. 세계 외교계의 거물로 통하는 그는 우리나라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는 분이다. 그가 있는 한 북한은 필리핀에서 명함을 내밀 수가 없었다. 이멜다 여사가 네팔 왕 즉위식에 대통령 특사로 참석, 함께 참석한 북한의 이종옥 특사와 접촉한 뒤 북한 대사관을 마닐라에 설치할 계획을 추진했지만 이를 막은 사람이 바로 로물로 외무장관이다.

그러나 그보다 그는 이승만 박사를 광복 직후 미국에서 국내로 신속히 보내 준,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는 점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와 이박사의 인연은 특이하고 남달랐다.

로물로 장관은 맥아더 사령부의 핵심 참모였다. 원래 그는 필리핀 트리뷴지 기자로 일본군에 패해 호주까지 밀려난 맥아더 사령부를 취재하는 종군 기자였다. 영어에 능통한 데다 판단력이 뛰어나 맥아더가 그를 곧 자신의 참모로 임명한 것이다. 그래서 종군 기자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장교(대위) 옷으로 갈아입고 맥아더의 참모로 활약했는데 맥아더가 1944년 일본을 몰아내고 필리핀을 되찾자 그는 연락 장교로 워싱턴에 파견됐다. 이때 그는 미 육군준장이었다.

로물로 준장은 펜타곤과 백악관을 드나들면서 포토맥 강가에서 낚시질하고 있는 초라한 동양 늙은이를 발견한다. 70세쯤 돼 보이는 노인은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우두커니 낚싯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석상처럼 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처량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은 낚시 도구를 챙겨 귀가하는데 바로 로물로 장군 숙소의 건너편 오두막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기울어 가는 오두막집과 해지고 때가 전 와이셔츠를 입은 노인의 모습이 안쓰러워 로물로는 다음 날 자신이 입고 있는 와이셔츠와 새 옷 몇 벌을 준비해 낚시터로 나가 노인에게 건네줬다. 그러면서 물었다.

“혹시 중국 아니면 대만·필리핀에서 오신 분이 아니신가요?”

“아니오. 나는 코리아에서 온 이승만(1875~1965)이올시다.”

그때까지도 코리아는 낯설었다. 일본의 식민지 반도이거나 그냥 일본 또는 지식이 좀 있는 사람에게는 조선으로 알려졌을 뿐 코리아라는 이름은 생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약간 아는 지식을 토대로 다시 물었다.

“코리아라면 일본의 속국을 말하는 것인가요?”

“그렇소. 조선 반도를 말하오. 지금은 일본 식민지가 돼 있소.”

“그렇군요.”

45년 8월15일 이윽고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고 식민지 조선은 해방됐다. 그러나 미국의 태평양사령부는 일본 접수에만 정책을 집중했을 뿐 한국에 대해서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해 7월 포츠담 선언에서 조선과 대만을 독립시킨다고 했지만 사실 정책이 전무했으며, 그래서 방치했다는 편이 옳았다.

반면 소련은 8월8일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만주와 조선 국경선을 진격, 광복 닷새 후에는 벌써 함흥·원산에 상륙했다. 소련의 한반도 상륙 일정은 공식적으로 그렇지만 7월28일 청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