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제3話 빨간 마후라 -115- 박정희 대통령은 럭키맨 | |
사람을 보내 유엔 실무 책임자를 데려온 로물로는 일사천리로 유엔의 한국전쟁 참전을 결의했다. 그리고 맨 먼저 필리핀이 참전하도록 행동으로 보여 줬다. 로물로의 이 같은 조치는 맥아더와 함께 애써 확보한 민주 진영이 위기를 맞았다는 절박감에서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3개월 전 애치슨 미 국무장관과 하버드 대학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인 것도 한 요인이 됐다. 로물로는 1950년 3월 애치슨과 함께 하버드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수상 연설에서 그는 49년 6월29일 미군이 한국에서 전면 철수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한국을 침략하라는 초청장을 발부해 준 것이나 다름없다며 이 정책을 수행한 옆자리의 애치슨 국무장관을 격렬히 비난했다. 애치슨은 로물로의 이 같은 무례와 내정 간섭적 발언에 대해 거칠게 반발, 수상식장이 얼음집인 ‘이글루’가 됐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였다. 3개월 후 6·25전쟁이 터지자 로물로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책임감을 느끼고 재빨리 유엔 총회 의장이라는 직분을 십분 활용해 유엔 참전 결의를 이끌어 낸 것이다. 로물로 장관은 나보다 23세 많은 아버지뻘이었지만 언제나 같은 군인의 길을 걸어온 동지로 나를 대했다.내가 필리핀 대사 임기를 마칠 때쯤 3급지인 덴마크 대사로 전보되자 누구보다 화를 내며 거기 가려면 눌러앉으라고 권할 정도로 내 보호자 역할을 한 사람이다. 나는 7년 동안의 해외 생활에 지쳐 고국으로 돌아가 조용히 쉴 예정이었는데 덴마크 대사관에서 망명자가 나오는 등 사고가 터지자 박동진 외무부장관이 내가 아니면 해결할 사람이 없다며 한 번만 더 고생해 달라는 간곡한 당부를 받고 가게 됐다. 그러자 로물로 장관은 본국으로 영전돼 가야 할 사람이라며 항의 서한을 보낼 움직임까지 보였다. 74년 8월6일 나의 주선으로 로물로 장관이 서울대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그는 명예박사 학위가 80여 개 된다). 수상식이 끝나자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위해 청와대에서 오찬을 베풀었다. 오찬을 위해 로물로 장관을 수행, 청와대로 들어가는데 로물로 장관이 불쑥 “박대통령은 러키맨이야”하고 말했다. “왜 러키맨입니까.” “부인 육영수 여사를 두었기 때문이야. 조용히 뒤에서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모습을 보면 박대통령은 정말 러키맨이야.” 이 말은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 여사를 빗대고 한 말이었다. 박대통령과 육여사를 칭찬하는 동시에 매사에 설쳐대는 이멜다 여사와 이를 방관하는 마르코스를 비판하는 외교적 수사인 것이다. 8월12일 출국 보고를 위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대통령께 로물로 장관의 얘기를 꺼냈다. “각하, 로물로 장관이 각하더러 러키맨이라고 합니다.” “왜 내가 러키맨이야.” “네. 육영수 여사 같은 영부인을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내 칭찬은 아니구먼.” 이렇게 말하면서도 박대통령은 싫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말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이야말로 러키맨이야.” “왜 그렇습니까.” “생각해 봐. 로물로 같은 인물을 외무장관으로 두었으니 러키맨이지.” 그 무렵 미국·영국·프랑스·독일 조야에서는 마르코스가 독재를 하고 있다고 여론이 들끓었다. 이때 로물로가 이들 나라를 한 번 순방하고 돌아오면 마르코스 비난의 목소리들이 한동안 잠잠해졌다. 이런 것을 박대통령은 잘 알고 있었다. 로물로 장관이 그토록 칭찬해 마지않던 육여사는 그러나 사흘 후 8·15 경축식장에서 문세광의 저격을 받고 사망하는 비운을 맞는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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