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제3話 빨간 마후라 -117- 난장판의 덴마크 대사관 | |
필리핀은 벼농사를 3모작까지 한다. 농촌 출신인 나는 벼농사 한 번 하고 삼계절을 빈 땅으로 놀리는 우리 농촌 현실이 늘 안타까웠다. 필리핀은 사계절 기후가 온난해 3모작을 하겠지만 특별한 경작법도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닐라 인근 농사개량연구소를 방문한 뒤 수원 농업진흥청의 벼 품질 개량 연구자들을 초청했다. 고국의 식량 증산책을 지원하며 임기를 마칠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박동진 외무부장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장대사, 필리핀 대사 임기가 끝나 가는데 이제 덴마크로 가야 되겠소.” 나는 좀 불쾌했다. 느닷없이 3급지 대사로 가라고 명령하다니. “아니, 나는 이제 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오, 친구로서 부탁이니 꼭 좀 덴마크로 가야겠소. 지금 덴마크가 큰일이오. 서기관이 망명해 버리고 북한 대사관이 계속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소.” “아닙니다. 이제는 쉬고 싶습니다.” “안 되오. 벌써 우리는 덴마크 정부에 아그레망(신임장)을 신청해 놓았소.” 그러나 평양 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그만 아닌가. 나는 완강하게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했다. 나의 거부로 외무부가 신임장을 취소하기 위해 덴마크 정부에 연락을 취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덴마크 정부가 발끈했다. 신임장을 신청했다가 취소하고, 애들 장난하느냐는 것이었다. 박장관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대단히 입장이 곤란하게 됐소. 친구를 위해 한 번만 고생해 주시오.” 친구의 부탁이라니 어쩔 수 없었다. 응낙하고 나는 1976년 6월 덴마크로 떠났다. 덴마크 대사관은 3등 서기관 한 명이 공금을 유용하고 뒤탈이 두려워 덴마크 정부에 정치적 망명을 해 버리고 그사이 대사도 두 사람이나 교체돼 있었다. 1년 몇 개월 만에 나는 세 번째 대사로 부임한 것이었다. 그러니 외교가에서 한국 대사 꼴이 말이 아니었다. 여기에 아그레망 취소 소동까지 벌어졌으니 웃음거리가 돼 있었다. 부임 며칠 후 나는 관례대로 우방국 대표 격인 미국 대사관을 찾았다. 미국 대사는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내저으며 “동맹국으로서 민망하오”하고 말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 때 미군 사단사령부의 정치 고문으로 근무하면서 인근의 우리 해병여단과 교류가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국 사정에 매우 밝았다. “○○○ 대사가 외교 공식 리셉션에는 나오지 않고 대단히 비사교적이고 비협조적이었소. 주정뱅이로 악명이 높았소. 북한 친구들이 와서 사사건건 부딪치는데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소. 거기다 망명자가 나오고 남북한 번갈아 추문이 터져 나오니 부끄러운 일이오. 북한 애들이 술·담배·마약 밀수 혐의를 받고 있지만 타국인들이 친절하게 북한 애들 수작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오. 한국 대사관이 단단히 대비하시오. 한국 대사관 직원들마저 그런데 관련됐다는 혐의를 받는다면 고립되고 맙니다.” 우방국 대사의 애정 어린 충고였지만 그런 말 듣는 자체가 충격이었다. 나는 대사관으로 돌아와 직원 회의를 열었다. 그랬더니 직원들이 자신들을 범죄자 취급한다며 궁시렁거렸다. 예방 차원에서 한 얘기인데 그들은 나한테까지 반발했다. 어느 날 자고 있는데 새벽 3시쯤 정체불명의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의 아빠 ○○○입니다.” 망명한 3등 서기관이었다. 그자는 자기 자식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해 아내가 임신하자 대사관 금고를 털어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를 낳으면서 아이의 시민권을 얻은 사람이었다. 이 같은 비리를 알고 본국 송환 명령이 떨어지자 망명한 것인데 무엇이 못마땅한지 매일 신임 대사인 나에게 전화를 걸어 되지도 않는 욕을 퍼붓고 조국을 비난했다. 나는 화가 나서 잡히면 반 죽여 놓으리라 생각했는데 대사관 직원들이 제풀에 꺾일 때까지 내버려 두라고 해서 놓아두었더니 한 달쯤 지나자 잠잠해졌다. 대사 부임 통과 의례치고는 너무나 시끄러운 대접이었다.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날마다 대사관 앞 도로와 숙소 앞에 북한 대사관 사람들과 정체 모를 사람 10∼15명이 피켓을 들고 나와 구호를 외쳐 댔다. 불쌍한 고아들을 팔아먹는 남조선 각성하라!” “미국놈과 붙어먹어 낳은 종자를 팔아먹는 남조선 물러가라!” 따위 구호들이었다. 한국은 매월 30여 명의 고아를 덴마크 가정에 입양시키고 있었다. 시위를 보고 있자니 속이 끓어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어이 싸움이 붙고 말았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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