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제3話 빨간 마후라 -118- 북한대사 추방령 | |
동양인 4∼5명이 내 숙소와 주변 거리, 그리고 마을 이곳저곳을 더듬듯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내가 먼저 발견하고 놀라자 화가 난 나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느 놈들이냐?” “어느 놈들이라니?” 그들은 분명히 한국말을 쓰고 있었다. 나는 온몸이 떨렸다. 북한 놈들이 내 숙소까지 쫓아와 몰래 촬영하고 있구나. 그러나 이런 때 밀리면 안 된다. “썩 물러가라!” “이 사람, 누구한테 물러가라 마라 야단이야?” “남의 집을 몰래 촬영하는 못된 놈들! 정체가 뭐냐. 나는 대한민국 대사다.” 나는 그동안 당한 것까지 생각나 그중 한 사람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우리도 한국에서 왔는데요.” 그제서야 나는 멱살을 풀고 “한국에서 왔다고요?”하고 반문했다. “우리는 경남의 ○○건설회사 주택건설팀입니다. 코펜하겐의 이 마을이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해서 연구 과제용 사진으로 담아 가는 중입니다.” 나는 맥이 빠져 버렸다. 그들을 집으로 데려와 점심 대접을 하면서 그동안 북한 대사관의 장난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인 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외교 리셉션장에 갈 때마다 각국 대사들이 자유·공산 진영 두 패로 갈려 모이는 장면이 곧잘 연출됐다. 자유 진영은 미국 대사 편에 몰리고 소련 대사 쪽에는 동유럽·아프리카 대사들이 20여 명씩 떼거리로 붙어 있었다. 반면 중국 대사는 언제나 외톨이였다. 자유 진영도 공산 진영도 붙지 않아 혼자 앉아 있기 일쑤였다. 냉전의 한복판에 있던 때의 우울한 풍경이다. 1976년 11월 말 오후 6시30분쯤 저녁 식사를 하려는데 덴마크 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지면이 있는 기자였다. “장대사께 중대한 일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좀 전 6시에 북한 대사관이 술·담배·마약을 향락촌에 밀매하려다 덜미가 잡혔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한 대사 추방령이 내려졌습니다.” “뭐가 어째요?” 나는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기자에 따르면 코펜하겐 경찰청이 한 대학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교수를 데려다 북한 대사관의 전화 통화 내역을 감청한 것을 분석한 결과 동유럽,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 주재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 공모해 위조 지폐 유통과 마약·밀주·담배를 밀매한 현장을 알아내 급습했다는 것이다. 이 중 마약과 담배 제조 현장은 미 대사관의 중앙정보국(CIA) 요원이 찾아냈다. 미 정보원은 스페인 참사관과 친구로 지내면서 그 집에 자주 놀러 갔는데 한밤중이면 이웃집에서 드릴 돌아가는 소리, 못을 빼고 박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수사 요원을 증파해 살펴보니 그곳이 바로 북한 대사관 직원이 사는 집이고, 한밤중이면 별도의 위장 상자에 물건을 담기 위해 작업하는 중이었다. 고요한 한밤중에는 소리가 더 크게 나고, 또 민가에서 규칙적으로 이상한 소리가 나면 이웃으로부터 의심받는다는 것을 모르고 작업하다 두 외국인 정보원에 의해 덜미가 잡힌 것이다. 물증을 포착한 덴마크 경찰은 전화 통화 내용대로 동독에서 덴마크로 오는 배에서 물건을 받아 북한 대사관 차에 옮겨 싣는 것을 급습했다. 운전기사는 “외교관 차”라며 트렁크 열기를 거부했으나 경찰은 ‘범죄 차량에 대한 압수 수색 영장’을 발부해 불법 물품을 모두 꺼냈다. 그리고 북한 대사 이하 전원에게 6일 내에 나가라는 추방령을 내렸다. 뒤이어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 주재 북한 대사와 직원들에게도 추방령이 내려졌다. 덴마크 신문 기자는 이 같은 사실을 나에게 전화로 알려 주기에 앞서 우리 대사관 참사관(중앙정보부 파견원)에게 먼저 알려 줬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다시 알려 준 것인데 참사관은 나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서울의 자기 본부로 전보를 치고 음악회에 가 버렸다. 나도 곧바로 서울로 전화를 걸어 박동진 외무부장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한 일이었다. 부하는 알고 대사는 모르는 꼴이 돼 버릴 뻔 했기 때문이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1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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