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5일 아침부터 27일 아침까지의 48시간은 어느 한 순간 나라의 안위와 직결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이틀 동안 나는 해군본부 상황실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전화통에 매달렸다. 시시각각 발생하는 상황 대처에 먹고 자고 배설하고픈 생리적 욕구를 느낄 새가 없었다.
그 시간에 일어난 문제는 동해상에서 발생한 괴선박 대처, 해군 작전지휘권 이양, 옹진반도에 고립된 육군17연대 구출, 한전 지금(地金) 처리 등 모두가 긴박한 일이었다.
제일 먼저 발생한 문제가 한국은행 지금 문제였다. 국방부 제3국장(관리담당) 김일환 대령 보좌관으로 나가 있던 정규섭 소령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한국은행 지하실에 보관돼 있는 금괴 1.5톤과 은괴 2.5톤을 피난시켜야 하는데 남쪽으로 안전하게 수송할 수 있는 곳은 해군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정소령은 나와 사관학교 동기생이어서 나를 믿고 한 전화였지만 정보참모인 내 직권으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어 안타까웠다.
이 문제는 김일환 대령이 당시 한국은행 구용서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할 셈이냐고 물어 생긴 일이었다. 구총재는 즉시 국무총리를 겸하고 있던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협조를 요청, 김대령을 통해 해군본부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동해 상황도 있고 육군17연대 구출 문제까지 해군이 떠맡아 정신 없는 판에 그런 일에까지 신경을 쓸 여유도 능력도 없었다. 결국 최종 결정권자가 부재 중이라는 사정도 있어 그 문제는 일단 육군에 맡겨져 대전까지 수송됐고, 거기서 해군이 인수해 진해까지 안전하게 수송됐다.
육군17연대 구출 문제는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일요일 새벽 북한 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황해도 옹진반도에 주둔 중이던 17연대는 순식간에 적진에 떨어져 고립무원 상태가 됐다. 38선 서단(西端) 접경 지역이었던 옹진반도가 금세 적 치하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연대 병력이 몰살하느냐 구출되느냐 하는 중대사가 걸린 과제여서 해군으로서는 모든 지혜와 기동력을 총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동해상의 괴선박 대처 문제까지 발생했으니 잠자고 밥먹을 생각이 나겠는가. 이 문제는 국적 불명의 검문 불응 선박을 공격해 침몰시킬 것인가, 그냥 모른 척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으로 뒷날 우리 해군의 단독 작전 제1호를 기록한 중대 상황이었다. 인민군의 동해안 상륙에 대처하기 위해 진해를 떠나 현장으로 항진하던 701함의 괴선박 발견 보고에서부터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무려 4시간이 소요됐다.
현장에서 701함은 빨리 결단을 내려 달라고 독촉해 왔지만 해군본부 단독으로 결정을 내릴 문제가 아니라는 게 모든 참모들의 의견이었다.
국방부에 보고하고 하회를 요청해도 대답은 “정체를 확인해 보라”는 것뿐이었다. 애매모호한 국방부의 태도와 빗발치는 현장의 공격 명령 독촉 사이에서 곤욕을 치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작전 지휘권 문제는 인민군 공군의 공습으로 본부의 통신 시설이 훼손될 가능성 때문에 결정이 쉬웠다. 게다가 정부와 육군본부까지 서울을 포기하고 피란을 가는 판이어서 더 이상 서울에 남아 지휘권을 행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정리=문창재(언론인)>
2006.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