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바다로 세계로!

<372>바다로 세계로! -2- 가장 길었던 48시간-1

화이트보스 2009. 5. 27. 21:16

<372>바다로 세계로! -2- 가장 길었던 48시간-1

일요일 아침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시간이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한 대가로 주어지는 느긋한 여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휴식이다. 더구나 주말 기분에 휩쓸려 늦도록 토요일 밤을 즐긴 사람들에게는 꿀맛보다 달콤한 순간이기도 하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귀청을 뚫을 것 같은 전화 벨 소리에 잠을 깬 시간은 새벽 5시45분이었다.

“이 시간에 웬 전화람.” 볼멘 소리로 수화기를 집어 든 내 귀에 울리는 첫 음성은 해군본부 정보감실 당직사관 장소위였다.

“조금 전 강원도 옥계 방면 해안으로 인민군이 상륙 중이라는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어 전군 장병의 외박·외출이 허용되지 않았던가. 밤새 아무 상황이 없었는데 인민군이 상륙을 하다니…. 보고가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아 “무슨 소리냐”고 다그쳐 물어도 장소위 대답은 똑같았다. 그렇다면 위급 상황이 발생한 것이 분명했다.

“LST 함정이 지금 어디 있는지 빨리 확인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 그리고 인천 경비사령관에게 연락할 수 있게 수배해 놓도록!”

당시 해군본부 정보감 보직에 있던 나는 응급조치를 취해 놓고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인민군 병력이 동해안에 상륙하고 있다는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지만 즉각 대응 태세를 서둘러야 한다는 막연한 긴박감이 들었다.

출근을 서두르는데 중화 군이 방문 앞에 나타나 “인천 조개구이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채근했다. 총각 해군소령이었던 내가 기거하고 있는 주인집 둘째 아들은 벌써 몇 주일 전부터 “노는 날 일 없으면 인천에 데려가 조개구이를 사 주겠다”던 약속을 또 펑크낼까 봐 마음을 졸였던 모양이다.

“지금 급한 상황이 생긴 것 같으니 다음주에 가자”고 달랬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중화 군은 실망의 빛이 역력한 얼굴로 “오후라도 시간이 나면 데려 갈 수 없겠느냐”며 아쉬워했다.

그때 내가 기숙하던 친지의 집은 서울 서대문구 신촌 이화여대 입구 노고산동에 있었다. 중구 명동 입구에 있던 해군본부까지 직선으로 2㎞ 남짓한 거리였다. 아침 6시가 조금 지나 본부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맞닥뜨린 사람은 정보감실 제1과장 문기섭 소령이었다.

“이건 전쟁이야!”

나와 해군사관학교 제1기 동기생으로 뒤에 백령도 도서부대장과 해군본부 정보부장을 역임한 그는 무슨 일이냐는 내 물음에 대뜸 이렇게 단정했다. 그러면서 7시에 해군본부 긴급 작전 회의가 소집됐으니 정보감실 일은 자신에게 맡기고 어서 가 보라고 독촉했다.

일제 시대 미나카이 백화점이었던 본부 건물 회의실로 달려가면서 나는 참모총장도 없는 때에 이 비상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마음이 무거웠다. 손원일(孫元一) 참모총장뿐만 아니라 이럴 때 가장 중요한 보직인 박옥규(朴沃圭) 작전참모도 총장을 수행한 터여서 해군본부는 주인이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총장님 일행이 진주만에 도착했을 시간 아닌가. 외무부에 의뢰해 하와이와 즉각 연락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연락 여부를 시시각각 확인하라.”

나는 제일 시급한 조치부터 해 놓고 회의장으로 달려 갔다.

<정리=문창재 (언론인)>

2006.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