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바다로 세계로!

<376>바다로 세계로! -6- 한은 금괴 수송작전

화이트보스 2009. 5. 27. 21:18

<376>바다로 세계로! -6- 한은 금괴 수송작전

아찔한 순간은 많았지만 지금 돌이켜 봐도 손에 땀을 쥐게 한 일이 한국은행 지금(地金) 수송 작전이다. 해군사관학교 동기 정규섭 소령 전화를 받고 북새통 속에서도 함께 걱정한 일이어서 더욱 기억에 새롭다.

만일 그 일을 등한히 해 4톤에 달하는 금괴·은괴가 인민군 손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말할 것도 없이 전시 한국 경제는 상상하지 못할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북한은 앉은 채 횡재, 전쟁 비용을 불렸을 것 아닌가.

그 일에는 국방부 제3국장이던 김일환 대령의 공로가 컸다. 당시 한국은행 총재였던 구용서 씨 회고에 따르면 6월27일 아침 9시 무렵 김대령이 전화를 걸어 대뜸 “금괴 문제는 어떻게 할 거요”하고 물었다고 한다.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고 반문했더니 “가지고 나가야지요”하고는 전화가 끊겼다.

그 뒤 구총재는 최순주 재무부장관과 신성모 국방부장관을 찾아가 방법을 의논했고 김대령은 나름대로 철수 작전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의 보좌관 정규섭 소령은 “6월26일 아침(구총재 증언과 하루 차이가 있음) 김국장이 아무 말 없이 같이 가자고 해 따라가 보니 한국은행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곳에는 구총재와 최재무부장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소령은 비서실에서 대기하고, 세 사람이 지금과 현찰이 보관돼 있는 지하실에 내려갔다 총재실로 돌아왔다. 잠시 후 소총으로 경무장한 헌병 1개 소대가 GMC(군용트럭)를 타고 도착했다. 이때 구총재는 “국가 재산을 그냥 내줄 수 없다”면서 지금과 직원 둘을 붙여 호송에 참여케 했다. 그래도 못 미더웠던지 직원들이 직무를 이탈하려 하거든 군에서 징발해 달라고 김대령에게 부탁했다.

김국장은 뒷날 회고록에 “국방부 회의에서 군수물자 통제 업무를 맡게 돼 한국은행 소장 귀중품을 소개하기로 됐는데, 가장 어려운 일이 금·은의 무사 반출이었다. 헌병사령관 송요찬 대령이 헌병 1개 소대를 차출해 줘 정규섭 해군소령과 함께 가서 자동차 두 대에 실어 냈다”고 썼다. 금괴·은괴가 든 상자는 무려 89개나 됐다.

이렇게 실려 나간 금괴는 한국은행 대전지점에 보관됐다가 해군에 인계됐다. 당시 진해보급창장 김익성 소령이 인수, 무사히 진해 보급창으로 이송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이 위험해지자 해군의 건의를 받은 정부 지시로 금괴는 다시 부산으로 피난했다.

뒷날 알게 된 일이지만 이 금괴는 미국 권고로 8월1일 샌프란시스코 행 선박에 실렸다. 부산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만일의 상황에 대비한 조치였다.

그러나 금덩이는 다시 한국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55년 국제통화기금(IMF)이 창설될 때 한국은 이 금괴를 처분해 기금 출자금으로 전용한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우리나라가 IMF 구제 금융을 받게 됐다. 우리는 그 일화가 떠올라 착잡한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이 얘기와 관련해 정규섭 소령이 잊지 못하는 일은 대전 철수 때 미곡 반송 일화다. 한국전쟁에 막 참전한 미 지상군 병력을 태우고 온 화차 편에 쌀 수천 석을 부산으로 실어 보내려는데 기관사가 도망쳐 버렸다. 알고 보니 미군이 후퇴하는 한국 경찰 중대를 적군으로 오인해 벌어진 총격전에 놀란 것이었다.

경주 철수 때는 김일환 대령과 함께 폭우 속을 달려가 경주박물관 국보급 문화재를 밤새도록 포장해 부산으로 피난시킨 일도 잊지 못할 일이라고 그는 회고하고 있다.

<정리=문창재 언론인>

2006.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