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바다로 세계로!

<378>바다로 세계로! -8- 대한해협 해전-2

화이트보스 2009. 5. 27. 21:18

<378>바다로 세계로! -8- 대한해협 해전-2

백두산함의 승전보는 철저한 충무정신의 결실이었다. 다른 임무를 부여받고 출동하던 백두산함이 공해상을 지나가는 수상한 함정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괴선박에 다가가지 않아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검문을 하지 않아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들의 전공은 더 빛난다.

공해상을 지나가는 배라고 무심히 지나쳤더라면 한국전쟁의 양상이 사뭇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많은 전사 연구가들의 견해다. 전쟁을 도발한 북한은 육상의 38선 돌파 작전과 함께 동해 연안과 부산 지역에 특공대를 상륙시키는 협공 작전을 꾀했는데 부산으로 가던 특공대 수송선이 격침당해 적화 통일 작전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다.

육군과 마찬가지로 해군도 느긋한 일요일 아침의 여유를 즐기다가 6·25라는 국가 비상 사태를 맞았다. 1950년 6월25일 아침 진해 통제부사령부에서 출항 명령을 받은 백두산함이 진해항을 출항한 것은 오후 3시였다. 당시의 백두산함 승조원들 증언을 종합하면 지금 세상에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동력이 약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승조원들에게 늦잠을 재웠습니다. 그동안 격무도 있고 해서 한 시간쯤 더 재워 7시에 승조원들을 기상시켰습니다. 밀린 빨래를 시키고 8시에 조식을 마쳤는데 통제부 사령장관 김성삼 대령이 달려와 출동을 서두르라고 명령하는 겁니다. 동해안 묵호 부근에 정체 불명의 군대가 상륙하고 있으니 이놈들을 때려 부숴야 한다는 거예요.”

백두산함 갑판사관 겸 항해사 겸 포술사였던 최영섭(77) 예비역 해군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비상 출동에 한나절이 더 걸렸다. 비상소집령이 떨어졌으나 통신망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시절이었다. 헌병들을 시켜 진해시내를 돌며 승조 장교들을 끌어모으는 방법밖에 없었다.

식량과 연료·식수·탄약·군수품 등 출동에 필요한 것들을 선적하고 있는데, 김사령장관으로부터 “백두산함은 단독 출항하지 말고 진해항에 정박 중인 YMS(미 소해정) 518정과 512정을 대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518정의 출동 준비가 너무 늦어 백두산함은 오후 3시 512정만 데리고 먼저 출항했다.

함장 최용남 중령, 부장 송석호 소령, 기관장 신만균 소령, 포술장 유용빈 중위, 기관사 강명혁 중위와 김종식 소위,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 군의관 김인형 중위를 포함해 승조원은 총 60명이었다. 목적지는 묵호 해안, 임무는 상륙을 기도하는 ‘정체 불명의 군대’를 쳐부수는 것이었다. 그 사이 정체 불명의 군대가 북한 인민군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첫 전투 출동에 임하는 장병들은 눈빛으로 임전무퇴의 각오를 주고받으며 각자의 위치에서 말없이 근무에 임했다.

최고 속력 18노트인 백두산함은 오후 6시30분을 지나 부산 오륙도 등대를 통과하면서 침로를 북으로 잡아 곧장 항진했다. 하지가 지난 지 며칠 되지 않아 아직 어둠이 깃들기 전의 저녁 바다는 흐렸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 그런대로 쾌적한 기상이었다. 인민군과 해상에서 조우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지난 주말까지 백두산함을 몰고 동서남해의 각 경비사령부를 순항한 승조원들은 누구나 첫 경험에 긴장했다.

브리지에서 견시(見視·관측병) 두 사람이 쌍안경으로 좌우 해상을 훑어보는 가운데 당직사관 최소위는 나침반 옆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막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오른쪽 해상을 살피던 조병호 일등수병의 눈에 수평선 저쪽에서 어렴풋이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한 줄기가 포착됐다. 순간 그의 표정에 긴장의 빛이 어렸다.

<정리=문창재 (언론인)>

2006.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