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바다로 세계로!

<377>바다로 세계로! -7- 대한해협 해전-1

화이트보스 2009. 5. 27. 21:18

<377>바다로 세계로! -7- 대한해협 해전-1

6·25 그날 아침부터 시작된 긴박한 48시간 가운데 어느 한 순간 중요하지 않은 시간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대한해협 해전과 관련한 상황은 정말 피를 말리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25일 해 질 무렵 동해상에서 남쪽으로 항진하는 괴선박을 발견한 701함(백두산함)의 첫 보고가 들어온 이후 다음날 새벽 상황이 끝날 때까지 하룻밤은 숨을 크게 쉬기도 어려운 시간이었다. 백두산함은 수시로 “빨리 지침을 내려 달라”고 독촉하는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의무가 있는 본부로서는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이 상황은 즉시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보고됐다. 본부 작전 회의에서는 공해상이라도 검문에 불응하는 선박이라면 나포하거나 강제 정선시킬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해전에 관한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본부 참모들은 선박의 정체에 신경이 쓰여 최종 판단은 함장에게 맡기자는 신중론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시시각각 들어오는 함장의 보고를 분석하던 중 결정적인 정보가 입수됐다. 백두산함이 괴선박을 100m 거리까지 접근해 탐조등으로 확인해 보니 선명도 국기도 없이 병력이 가득 실려 있다고 보고해 온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어졌다.

“괴선박을 격침하라. 성공을 빈다.”

참모총장 직무대행 김영철 대령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고 비장하게 명령했다. 26일 0시10분, 괴선박 발견 보고로부터 꼭 4시간이 지나서였다. 이 명령은 즉시 국방장관에게도 보고됐다. 마침 경무대에 가 있던 신장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상황실 책임자인 내가 받았다. 해군본부의 격침 명령을 확인하려는 전화였다.

“격침 명령을 내렸다고 괴선박이 침몰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전 회의 멤버 가운데 최연장자인 김일병 대령의 이 말 한 마디로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배의 크기로 보나 병력 수로 보나, 낙관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함소령, 백두산함 부장이 송석호 소령이지요?”

김대령의 질문은 그가 나와 해군사관학교 동기생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기관장 신만균 소령도 동기생이라고 대답하자, 김대령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졸업 당시 해사 교장이었던 그는 1기생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새삼 따뜻한 스승의 정이 느껴졌다.

시시각각 들어오는 전황을 분석·처리하면서 나는 비로소 전쟁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적선 좌현 3마일 거리에 접근해 3인치 포 20발을 발사했음. 그중 5발 명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상황실에 함성이 터졌다. 뒤 이어 “적선도 57㎜, 37㎜ 포와 중기관총으로 응사함. 피아 치열하게 교전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와 다시 마음을 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시간쯤 지나 백두산함이 적선 우현 쪽에서 주포로 공격, 기관실에 명중시켰다는 내용과 적선 마스트 2개가 파괴돼 좌현 쪽으로 20도 정도 기울어 침몰 중이라는 보고가 잇따라 들어왔다.

또 한번 함성이 터졌다. 그 많은 병력을 태운 적함을 격침시켰다니 이런 승전보가 또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 해군이 독자적으로 수행한 첫 전투에서 거둔 이 엄청난 전과는 단순히 부산을 지킨 것이 아니었다. 부산을 잃었다면 미군과 유엔의 지원군 상륙, 그리고 군수 물자 수송은 어떻게 됐을까.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이 승전보의 의미는 자명해진다.

<정리=문창재(언론인)>

2006.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