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시(見視) 보고. 우현 45도 수평선 검은 연기 보임.”
쌍안경으로 뱃길 오른쪽을 살피던 조병호 일등수병이 당직사관 최소위에게 큰 소리로 보고했다. 시각은 오후 8시12분, 북위 35도 15분 동경 129도 31분 해역이었다.
최소위는 즉각 조수병에게서 쌍안경을 넘겨받아 황혼이 물드는 동쪽 지평선을 살펴보았다. 사실이었다. 연기의 굵기로 보아 어선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처음 생각이었다. 어선이 아니라면 화물선이나 상선일 텐데, 동해 공해상으로 남하하는 화물선이나 상선이 있을 수 없는 시대였다.
최소위는 즉시 최용남 함장에게 수상한 선박 발견 사실을 보고하고, 연기 나는 괴선박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말했다. 최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백두산의 침로를 수상한 선박이 항해하는 동쪽으로 돌리도록 지시했다. 12km 뒤에서 힘겹게 따라오는 512정에는 “본함은 작전상 잠시 항로를 이탈하니 귀선은 예정대로 북상하라”고 지시했다. 금세 상황이 끝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첫눈에 그 배는 수상했다. 가까이 가 보니 어선도 상선도 화물선도 아닌 해군 수송선(FS급)이었다. 선체에는 온통 시커먼 페인트가 칠해져 있고 배 이름도 표지도 없는 데다, 국기도 달지 않아 어느 나라 배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백두산은 국기를 달지 않은 것에 의심을 품고 그 배를 따라 남하하면서 국제 기준에 따라 검문을 시작했다.
첫 단계는 손으로 깃발을 흔들어 검문의 뜻을 전하는 수기 신호였다. 5km 거리를 두고 따라가면서 함교 뒤편에서 김세현 삼조(현재 계급 하사)와 최도기 삼조가 열심히 깃발을 흔들었으나 응답이 없었다.
날이 어두워져 혹시 깃발을 보지 못한 것인가 싶어 이번에는 탐조등을 이용한 국제 신호를 보냈다. 박순서 삼조는 JF(귀선의 국기를 내보이라), NHIJPO(다시 귀선의 국기를 보여 줄 것을 요구한다), IJG(언제 어느 항구를 출항했는가), LDO(목적지는 어디인가) 신호를 30여분 간 발신했다. 그러나 괴선박은 아무 응답 없이 계속 남하했다.
“부산 동북방 약 50km 해역에서 정체불명의 괴선박 발견. 크기는 1000톤급, 형태는 수송선, 정남향으로 시속 12노트로 항진 중. 계속되는 검문에 일절 응답 없음.”
해군본부에 처음 들어온 상황 보고였다. 선박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해 보고하라는 지시가 즉시 하달됐다.
백두산은 다시 발광 신호를 이용해 K(정지하라), OL(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신호를 여러 차례 보냈다. 그래도 괴선박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시간은 벌써 2시간이 흘렀다. 빨리 정체를 확인하라는 본부 지시에 따라 백두산은 속도를 높여 괴선박을 100m 거리까지 접근해 탐조등을 비춰 보았다.
모두 깜짝 놀랐다. 갑판 앞쪽에 대포로 보이는 커다란 물체가 포장으로 가려져 있고, 중갑판 양쪽에는 중기관총이 장착돼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갑판 위에 누런 국방색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갑판 위에 빽빽이 줄지어 앉아 아무 동요도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백두산 승조원들은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다. 무장선에 접근해 조명등을 비춘 것은 나를 향해 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가 아닌가. 그러나 등화관제 후 기습적으로 과감히 접근해 적선임을 확인하게 됐으니 행운은 우리 편이었다.
<정리=문창재(언론인)>:
2006.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