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바다로 세계로!

<371>바다로 세계로! -1- 서 언

화이트보스 2009. 5. 27. 21:16

<371>바다로 세계로! -1- 서 언

남에게 자신을 말한다는 것은 늘 조심스러운 일이다. 특히 현대사의 중요 사건을 혼자서 언급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오래 전의 일일수록 내 편에서 본 모습과 나만의 생각을 말하기 쉽다. 그러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달라질 수 있고, 이런 것들이 뒷날 정확한 역사 기술을 그르치는 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혼자 겪은 일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관련된 전쟁이나 작전에 관한 일일수록 더 객관적이고 보편적 기술이 필요하다. 특정인 한 사람의 생각과 기억과 자료에 의존하면 사건의 본질이 달라지는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국방일보의 요청을 여러 번 고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선 “육군과 공군 측 얘기가 소개됐으니 이번에는 해군 차례”라는 권유에 고사의 변이 궁해졌다. 60만 장병과 수많은 재향군인이 애독하는 신문에 해군 얘기가 빠져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을 떨쳐 버리기 어려웠다. 그래도 꼭 내가 나설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했더니 경력으로 보나 연령으로 보나 ‘당신이 적임자’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느새 대한민국 해군 창설요원들은 다 고인이 됐고, 참모총장 경험자 가운데 내가 선임자 중 한 사람이라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못해 수락했다.

내키지 않는 일을 수용하고 보니 걱정이 한 둘이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동료나 선후배들에게 누를 끼칠 수도 있고 명예를 훼손하는 일도 없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또 망설여졌다. 나를 너무 내세운 나머지 내 자랑이 되지 않을까, 그것도 걱정이었다.

그래서 해군 출신의 여러 동료들에게 자문을 구해 묘안을 얻었다. 군인으로서, 특히 초창기 해군 요원으로서 국가 방위에 몸 바친 일들을 중심으로 담담하게 회고해 보자는 것이었다. 되도록 많은 동료 선후배들의 경험담과 증언을 들어 객관적으로 기술하면 해군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겠고, 정확한 사료(史料)가 될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한국전쟁에 관한 역사는 그 주인공의 일원인 내가 보기에도 너무 부실하다. 특히 해군에 관한 부분은 너무 부족하고 미흡하다.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기록만 해도 해군의 역할에 대한 중요한 기록과 평가가 거의 생략되다시피 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우리 해군 결사대가 인천 앞바다 영흥도에 잠입해 정보를 수집하지 못했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1950년 6월25일 부산에 600여 명의 특공대를 상륙시키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오던 인민군 수송선을 우리 해군이 적발해 격침하지 않았다면 한국전의 양상이 어떻게 됐겠는가.

이런 공적이 한국전쟁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파묻혀 버린 진실의 파편을 캐내어 한국전쟁사 해군 편과 대한민국 해군사 초창기 편을 보완한다는 각오로 이 난을 활용할 생각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한국전쟁이 발발한 50년 6월25일 아침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날 이른 아침 해군본부 당직사관에게서 받은 다급한 전화 한 통으로부터 시작된 48시간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긴박한 순간의 집적(集積)이었다.

참모총장 부재 중에 발생한 국가 초비상 사태를 맞아 작전지휘권을 예하 부대에 넘겨 주지 않을 수 없었던 속사정이 말해 주듯, 그때 우리 군은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새해 벽두부터 귀중한 지면을 내 주신 국방일보에 감사하며 독자 여러분께도 아낌없는 지도와 편달을 바란다.

함명수 제독 주요 경력
1928년 평양 출생
해사1기 졸업(1946. 1~1947. 2)
제7대 해군참모총장(1964. 9~1966. 9)
한국수산개발공사 사장
한영공업주식회사 사장
제9·10대 국회위원

<정리=문창재(언론인)>

2006.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