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방법은 야음을 틈탄 은밀 도하로 결정됐다. 선발대가 몰래 강을 건너가 거점을 확보하고 본대의 도하를 지원케 한다는 계획이었다. 먼저 강을 건너가 적정을 살필 수영반이 편성됐다.
무기와 탄약 등을 고무보트에 싣고 어스름 달밤의 강을 헤엄쳐 건너간 14명의 정찰반 일행은 야트막한 고지와 그 주변을 정찰했다. 행주산 일대와 주변 마을에 적 경비병이 없다는 신호에 따라 9척의 LVT(수륙양용 장갑차)가 출발해 강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LVT들이 강변 모래사장을 달리고 있을 때 건너편 행주산 고지에서 기관총과 박격포가 작렬하기 시작했다. 수영반은 엉뚱한 곳을 행주산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장갑차 4대가 모래밭에 좌초되고 일부 승무원이 부상하자 도하작전은 중지됐다. 날이 밝은 뒤 정공법으로 작전이 변경됐다. 건너편 행주산을 향해 맹렬한 포격과 폭격이 시작됐다. 급속 도하작전이었다.
때마침 스트러블 제독과 세퍼드 미 해병대군단장, 알몬드 군단장, 스미스 해병대사단장 등이 도착해 개화산 위에서 도하작전을 참관했다. 마치 어전 경기를 하듯 각 도하부대 LVT들이 맹렬한 속도로 강을 건너갔다. 행주산 125고지에서도 포탄이 빗발처럼 날아왔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도하 제1진에게 제압당해 퇴각해 버린 것이다.
한국 해병대 제2대대는 20일 오전 10시 수륙양용 트럭(DUKW)을 이용해 강을 건넜다. 강매리 일대로 전개해 행주 지역 경계 임무를 수행하면서 능곡 방면으로 진출, 후방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도하 지점 접근로를 확보해 후속 부대의 도하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 작전 중 야간에 적 1개 중대 병력의 기습을 받았으나 즉각 격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적 사살 20명, 포로 20명의 전과를 올렸다.
다음날인 21일 해병대사령부와 제1대대 병력이 도하해 수색 지역에 집결함으로써 작전은 완료돼 서울 진격을 위한 교두보가 확보됐다.
여기까지는 순풍을 받은 돛배처럼 작전이 순조로웠다. 그러나 적군은 서울만은 내주지 않을 태세였다. 적은 연희동·신촌 등 서울 서부 지역에 배수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고길훈 소령이 지휘하는 한국 해병대 제1대대는 미 해병대 제5연대와 함께 수색에서 연희동 방면으로 진격해 적의 최후 방어선인 연희동 104고지를 빼앗기 위한 공격을 개시했다. 서울 방어의 보루인 이 고지를 잃지 않으려고 적은 완강하게 버텼다.
적의 서울 서측방 방어 병력은 인민군 25여단과 독립 78연대 소속 약 4000명이었다. 이 부대의 장교와 준사관은 대부분 중공군에서 복무했던 전투 유경험자들이었다. 그만큼 이 지역 방어를 중시했다는 얘기다.
21일 오전 한국 해병대가 가운데를 맡고 미 해병대가 좌우 전선을 맡아 공격이 시작됐다. 우세한 화력 지원에 힘입어 고지에 오른 해병대원과 적군 사이에 치열한 육박전이 전개됐다. 우리 힘으로 서울을 되찾겠다는 결의로 뭉친 해병용사들의 투지 앞에 적의 저항은 무너졌다.
“미 해병대와 교대해 고지 점령 작전을 시작했는데, 꼭 이틀이 걸렸습니다. 백병전 끝에 우리가 고지를 점령하자 인민군은 신촌에 주둔해 있던 부대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가해 왔어요. 그래서 우리 부대의 서대문 형무소 도착이 다른 부대보다 하루 늦었지요.”
한국 해병대 제1대대 1중대 1소대장이었던 이서근 예비역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그 전투는 서울 탈환전 최고의 격전이었다.
<정리 = 문창재 (언론인)>
2006.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