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바다로 세계로!

<395>바다로 세계로! -25- 인천상륙작전-11

화이트보스 2009. 5. 27. 21:24
<395>바다로 세계로! -25- 인천상륙작전-11

비록 중앙청에 태극기는 올랐어도 서울이 그렇게 쉽사리 수복된 것은 아니었다. 적은 서울을 사수하기 위해 온 힘을 다 쏟아부어 완강하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중앙청 탈환 3일이 지나서야 환도식이 열렸다.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된 그날도 도심지와 외곽 지역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둔 시가전이 벌어졌다. 남대문을 확보하고 있던 미 해병대 2대대는 마포 쪽으로 뻗은 도로를 따라가며 하루 종일 공격을 계속했으나 진격 속도는 지루할 정도로 느렸다. 인민군이 1~2㎞에 하나씩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하고 있어 작전 수뇌부에서는 “섣부르게 만용을 부리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야 했다.

계속되는 맹렬한 포격전과 공중 폭격으로 서울 시가지가 어떤 피해를 입었을 것인가. 이것은 상상으로는 잘 떠오르지 않지만 기록으로 남은 사진과 신문의 르포기사를 보면 처참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내가 서울에 들어간 25일은 막 시가전이 시작될 무렵이었는데 26일이 되자 사방에는 북한군과 한국 민간인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참으로 비참한 광경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던 우리들도 이런 참상은 보지 못했다. 나는 시내 중심부 덕수궁까지 가 보았는데 도중에서 나는 세 명의 북한 여군이 총을 손에 쥔 채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북한은 여자까지 모아서 전선에 동원하고 있었다. 어느 한국인 말에 따르면 북한군은 서울에 들어오자 17세에서 45세까지의 남자들을 모두 북으로 데리고 가서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해 전선으로 내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군은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무자비하다고 해야 할지, 정말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다.’

9월29일자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에 실린 이 서울발 르포기사는 멜번 헤럴드 특파원 워너 기자가 쓴 것이다. 이 기사에서 워너는 “유엔군은 계속 적을 격멸하고 있지만 소탕전이 끝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 같다”고 썼다.

환도식이 열린 29일 정오까지도 소탕전의 총성이 그치지 않은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환도식은 중앙청 안에 있던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다. 이날 아침 10시 도쿄에서 김포비행장으로 날아온 맥아더 장군은 아직 시가전이 진행되고 있는 도로를 달려 식장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올라온 이승만 대통령과 3부 요인이 식장에 입장할 때는 군악대의 팡파르 대신 인근 교회에서 평화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대통령 각하, 인류 최대의 기대와 영감(靈感)을 기조로 하여 싸워 온 우리 유엔군은 하느님의 가호 아래 여기 한국의 수도 서울을 해방시켰습니다. 이제 수복한 서울을 대한민국 정부에 넘겨 드립니다.”미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맥아더 장군의 축사를 듣고 난 이대통령이 단상에 나와 카랑카랑한 특유의 음성을 가다듬어 인사말을 시작했다.

“나 자신의 영원한 감사와 한국민의 감사를 어떤 말로 다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영원한 감사’라는 표현 속에 수도를 빼앗겼던 대통령의 심정이 잘 드러난 인사였다.인사말을 마친 뒤 이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최고의 예우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맞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축전을 보내왔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대전사(大戰史)에서 유례가 드문 작전’이었다고 칭송했다.

<정리 = 문창재 (언론인)>

2006.03.06 김병륜 lyuen@dema.mil.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