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바다로 세계로!

<396>바다로 세계로! -26- 인천상륙작전-12

화이트보스 2009. 5. 27. 21:25

<396>바다로 세계로! -26- 인천상륙작전-12

“귀관이 수립한 공격과 이동 계획, 시기 선택과 실행은 참으로 훌륭했다…. 유엔이 귀관에게 위촉한 중대한 임무를 이런 혁혁한 전과로 완수한 것은 모든 사람의 신뢰에 보답한 것이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그토록 반대했던 브래들리 합참의장도 전문을 보내 작전의 성공을 극찬했다. 군 수뇌부와 정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맥아더가 이 작전을 강행한 것은 보급로 차단이 전쟁 수행에 결정적인 차질을 일으킨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보급이 차단돼 패전을 초래한 예가 10회 중 9회나 있었다는 것이 전사에서 증명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천에 상륙해 북한군을 격멸하려는 것이다.”

맥아더는 인천으로 상륙해 서울을 장악하면 낙동강 전선에서 임시 수도 부산의 목줄을 조이고 있는 적의 보급선을 끊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멋지게 실현돼 서울 탈환 이후 유엔군의 대 반격작전이 시작됐다. 그러나 상륙작전의 주역인 미국 해군의 반대 이유를 살펴보면 그것이 얼마나 큰 도박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인천 앞바다는 썰물 때 갯벌이 최고 3.2㎞나 노출돼 함정이 접근할 수 없다. 그나마 모래밭이 없고 안벽(岸壁)이 높아 상륙 주정을 육지까지 이동시킬 수가 없다.

인천항의 간만 차는 평균 6.9m, 심할 때는 10m에 이를 정도여서 간조 때 입항하려면 폭 2㎞, 수심 11~19m의 길고 구불구불한 수로(飛魚水路)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곳에 기뢰가 부설돼 있으면 모든 일이 허사다. 한 척이라도 격침되면 수로가 막혀 버리는 것이다.

이런 지형적인 악조건 아래 우선 인천이라는 병에서 코르크 마개를 뽑아야 한다. 아침 만조 시간에 월미도를 점령하고 주력부대 돌격 상륙은 부득이 저녁 만조 시간을 이용해야 한다. 적의 경계가 가장 심한 시간에 작전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데다 물이 빠지면 함정들은 멀리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

만조 시간은 약 2시간뿐이어서 그 사이에 병력은 물론 차량·장비 등 약 3000톤의 물자를 양륙시켜야 한다. LST들은 물이 빠지면 갯벌 위에 남게 되는데 이때는 적의 공격에 완전히 노출된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은 3분의 1 정도는 손상 입을 각오를 하고 LST 수를 그만큼 늘렸다. 이렇게 해 D-데이 4일까지 5만3882명의 병력과 6629대의 차량, 2만5512톤의 화물을 양륙했다.

인천항 입구에는 표고 105m 높이의 월미도가 방파제처럼 버티고 서 있어 이 섬부터 제압해야 한다. 이곳에는 적의 견고한 방어 시설이 있어 많은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또 인천항은 중심가에 인접해 있어 수많은 건물이 적의 방어 진지가 될 수 있다. 지리에 어두운 상륙군의 야간 전투에 치명적으로 불리한 조건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그럴수록 인천이 유리하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적은 이런 지형적인 악조건을 믿고 인천 방비를 소홀히 할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인천상륙 시도는 꿈도 꾸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인천상륙을 숨기기 위해 기만(欺瞞)과 양동(陽動) 작전을 병행했다. 상륙 지점이 다른 곳인 것처럼 꾸민 것이다.

이 계획에 따라 전함 미주리호는 9월13일 삼척 근해에서 적이 상륙 준비로 오인하도록 작전을 폈다. 미 77항공모함 기동부대도 9월10일 7만5000파운드의 네이팜 탄을 투하한 뒤 영국과 한국 해군만을 남기고 서해를 떠났다.

영국 항공모함 드림프호와 순양함 헬레나호는 평양 코앞인 진남포 일대를 공격했다. 동시에 군산을 상륙 지점으로 오인시키기 위한 공격도 병행됐다. 인천의 공격을 양동작전으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리 = 문창재(언론인)>

2006.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