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바다로 세계로!

<400>바다로 세계로!-30- X-레이작전-4

화이트보스 2009. 5. 27. 21:27
<400>바다로 세계로!-30- X-레이작전-4

제일 급한 것은 대원들의 통행증이었다. 그것 없이는 자유로운 통행이 보장되지 않아 첩보 수집 활동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두 사람에게 그 문제를 부탁했다.

보안서원으로 일하던 김씨와 내무서원 권씨는 기꺼이 돕겠다고 약속하더니, 오래지 않아 대원들의 통행증을 만들어 왔다. 그날부터 대원들은 인천을 자유로이 드나들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는 항공사진 촬영이나 통신장비를 이용한 감청 같은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분야, 즉 사람이 직접 가서 보고 듣고 확인해야 하는 ‘산정보’였다.

그때까지 미국이 갖고 있던 인천에 관한 지리적인 정보는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한 뒤 군정을 실시하기 위해 미군이 인천항에 입항하면서 수집한 것이 전부였다. 해도(海圖)와 공중 촬영 사진도 그 뒤의 변화가 반영되지 않은 낡은 것이었다.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려면 새롭고 정확한 정보가 있어야 했다.

김중위와 임소위는 피난 가지 않고 인천에 남아 있던 옛 조직원들을 끌어 모아 지하조직을 구성했다. 임소위는 하숙자로 위장해 김씨 집에 유숙하게 됐다. 통행증을 갖게 된 대원들은 낮에도 당당히 수원과 서울 근교까지 드나들며 정보 수집 활동을 했다. 권씨 친척집에 머무르게 된 김중위도 자주 영흥도를 왕래하며 수집한 정보와 첩보를 본부에 보고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월미도 정보였다. 제1 공격 목표인 그곳의 적정을 잘 알아야 첫 단계 작전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이다.그중에도 해안 방어시설 현황 파악이 필수 과제였다. 그렇다고 괜스레 얼쩡거리게 하다가 의심을 사면 산통이 다 깨진다. 궁리 끝에 월미도 해안도로 보수공사장 인부로 위장하는 수법을 택했다.

대원들은 정식 인부가 돼 작업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해안포대의 위치와 수, 규모를 파악했다.김중위와 임소위는 방어진지 구축 공사장 노무자가 돼 직접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간혹 인민군 복장을 하고 나가기도 했고, 경인가도 도로 보수공사장 노무자로 위장해 지나가는 적 병력과 장비의 이동 상황을 탐지하기도 했다.

해안 안벽 높이를 측정하기 위해 담 밑으로 내려가 키를 대보고, 그 위로 남은 높이를 목측해 보고했다. 활동 일주일이 지나면서부터는 새로운 조직원을 포섭, 조금씩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갔다. 붉은 돈의 효험이 컸다.이런 활동을 통해 얻은 정보와 첩보는 상륙작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월미도 해안에는 4문의 고사포와 400여 명의 병력이 있다, 소월미도에는 25정의 기관총과 5문의 포가 있다, 인천항 부두 안벽 참호진지에 1개 중대 병력이 있다, 월미도 양측에 4~5정의 기관총이 설치됐고 남측에도 2정의 기관총이 있다, 보병용 참호진지는 해안선에서 몇 피트 뒤에 구축됐다, 월미도 큰 건물 탑 속에 포병 CP가 있는 것 같다, 월미도 정면에 20문의 해안포가 있으며 콘크리트 참호진지와 터널이 사방으로 뚫려 있다 등등 ….

이런 정보와 첩보는 처음에는 해군본부를 경유해 GHQ로 보고됐다. 그러나 미 해군 정보장교 클라크 대위가 영흥도에 들어오고부터는 그를 통해 직접 GHQ로 보고됐다. 당시 한국 해군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첨단 통신장비 덕분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 지역 정보 수집을 위해 한국 해군첩보대를 투입하면서 별도의 미군 정보 조직을 영흥도에 보냈다. 클라크 대위는 연정(전 해군소령) 씨와 계인주(전 육군대령) 씨를 통역요원으로 대동하고 왔다.

<정리 = 문창재 (언론인)>

2006.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