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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김정일 회동이 가져올 파장을 주목한다

화이트보스 2009. 8. 5. 10:27

클린턴·김정일 회동이 가져올 파장을 주목한다

입력 : 2009.08.04 22:08 / 수정 : 2009.08.05 02:27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4일 북한에 억류된 미국 국적의 두 여기자 석방 교섭을 위해 방북해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했다. 조선중앙방송은 클린턴 전 대통령이 오바마

미 대통령의 구두 메시지를 김 위원장에게 전달했고, 두 사람은 공동 관심사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다고 보도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부인인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여기자 석방 교섭과 북한 핵 문제는 별개"라고 수차례 다짐했었다. 힐러리 장관의 말처럼 미국이 당장 북한과 핵협상을 벌이기엔 여러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클린턴 방북은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결정한 것이고, 그가 김 위원장에게 보낸 구두 메시지엔 여기자들 얘기만 들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이 보낼 수 있는 최고위급 인물을 북한에 보냈다. 클린턴 전 대통령과 김 위원장과의 만남은 미국측이 공식적으로 뭐라 설명하든 북한의 2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이후 양국 간의 직접 담판이 사실상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다. 당장은 아니라 해도 미·북 양자 협상의 개시는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클린턴·김정일 회담을 보며 1994년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1차 핵위기 속에 방북한 카터는 김일성과 만나 미국의 대북 제재 해제와 남북정상회담 성사라는 상황 반전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카터의 방북은 긴박한 상황을 잠시 누그러뜨렸을 뿐 근원적 문제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북한은 그 후 핵실험을 두 번이나 하고 핵보유국으로까지 행세하고 있다. 이번 클린턴 방북 역시 북한에 다시 당하고 문제는 그대로 남는 과거의 되풀이로 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클린턴 방북 소식을 접하고 많은 사람은 당혹스럽고, 미국에 배신감까지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일은 국제 정치를 움직이는 동력(動力)이 오직 자국의 이익 추구일 뿐이라는 현실을 다시 일깨워주는 사례일 뿐이다. 우리는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좀더 냉철하게 현실적으로 상황을 바라봐야 한다.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북한 핵이 미국을 적대시하는 테러집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다. 미국은 이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최우선이고, 미국의 그런 국익과 대한민국의 입장이 충돌할 경우 미국이 어떤 길을 택할 것이냐는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클린턴의 방북은 유엔을 통한 대북 제재가 갖고 있는 효용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북핵처럼 우리 운명이 걸린 문제에서 유엔의 권능에 대해 환상을 갖는 것은 금물이다. 중국이 있는 한 대북 봉쇄도 소용없고, 그렇다고 전쟁으로 북한을 굴복시킨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형식이 어떤 것이든 언젠가 미·북이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리라는 것은 예정된 일이다. 그 협상에서 북핵 문제는 한반도 문제 전체와 함께 논의될 것이고, 그 의제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문제도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평화협정 문제는 주한미군의 존재와 직결된다.

수년 안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방북과 미·북 정상회담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북한은 앞으로 이 과정에서 어떻게든 대한민국의 접근을 봉쇄하고 발언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이미 1994년 제네바 미·북회담에서도 우리는 귀동냥하는 처지였다. 이번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자체도 사전 통보 수준에 그친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대한민국은 한반도 문제의 최대 당사자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실체다. 대한민국이 빠진 자리에서 결정되는 한반도 문제는 어떤 것이든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전제 아래에서라면 미·북 담판이든, 미·북 정상회담이든 그것이 북핵 폐기와 한반도의 완전한 평화보장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 담대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미·북 협상의 과정이나 결과가 북핵을 기정사실화하거나 한반도에 불안과 파괴의 불씨를 남겨놓는 것이라면 결연히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그때에 우리가 가진 수단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정부는 모든 상황, 최악의 상황까지를 염두에 두고 면밀히 대비하고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 통합이 절실하다. 구체적인 외교 전략은 그다음의 문제다.

카터가 방북했을 때 김일성은 "우리는 핵을 개발할 의사도 없고 능력도 없다"고 했었다. 그 12년 뒤에 북한은 핵실험을 했다. 그러자 당시 미·북 협상 대표 갈루치는 "완전히 속았다"고 했다. 우리는 클린턴 방북이 그 재판(再版)이 될지 아닐지 앞으로 밀려들 변화와 파장을 열린 자세로, 그러나 냉철하게 지켜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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