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왕건死後 왕실의 운명 '원조외척' 왕규로 '흔들'

화이트보스 2009. 9. 5. 19:20

왕건死後 왕실의 운명 '원조외척' 왕규로 '흔들'

입력 : 2009.09.05 03:55 / 수정 : 2009.09.05 17:14

2代 혜종, 출신배경 미미… 입지 취약
왕규, 외손자 왕위 올리려 혜종제거 시도
정종 즉위 후 권력투쟁 끝에 왕규 처단

943년(태조 26) 5월, 20여일간 병석에 있던 고려의 창건자 태조 왕건이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이미 태조 4년(921)에 정윤(正胤·태자)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후계구도는 튼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20년 이상 태자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자 왕무(王武·훗날의 혜종)의 지위는 의외로 견고하지 못했다. 어머니 오씨의 미미한 출신배경 때문이었다.

'고려사'는 왕건과 오씨의 만남을 이렇게 전한다. 왕건이 궁예 밑에서 수군장수로서 나주지역을 책임지고 있을 때였다. 목포에 배를 정박시킨 왕건이 하늘을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신기하게 생각한 왕건이 그쪽 방향으로 가다보니 한 여인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태조가 그를 불러서 이성관계를 맺었는데 그의 가문이 한미한 탓으로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피임방법을 취하여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하였다. 왕후(오씨)는 즉시 그것을 흡수하였으므로 드디어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는 바 그가 혜종(惠宗)이다. 그런데 그의 낯에 돗자리 무늬가 있었다 하며 세상에서는 혜종을 '주름살 임금'이라고 불렀다."

정식 혼인을 통해 낳은 아들은 아니었지만 신혜왕후 류씨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왕건은 일찍부터 오씨가 낳은 이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오씨의 미천한 가문이었다. 그래서 왕건은 일찍부터 측근 장군인 박술희(?~945)로 하여금 태자를 책임지도록 당부했다. 왕건이 죽을 때 '훈요십조'를 전수한 장본인이 바로 박술희다.

태자는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고려 제2대 임금 혜종이다. 그러나 왕건이 우려한 대로 박술희를 제외한 대부분의 호족들은 혜종을 임금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선봉에 고려 외척(外戚)세도정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왕규(王規·?~945)가 있었다.

왕규는 지금의 경기도 광주(廣州)의 세력가로 일찍부터 왕건을 따랐다. 본관은 왕건과 다르지만 왕씨(王氏)를 칭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왕규가 일찍부터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왕규는 이중으로 왕건의 장인이었다. 두 딸이 왕건의 제15, 제16 후궁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 제16 후궁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이 아들 광주원군(廣州院君)을 낳았다.

왕규는 외손자 광주원군으로 하여금 혜종의 뒤를 잇게 하려 했다. 걸림돌은 혜종의 이복형제인 왕요(王堯·제3대 임금 정종)와 왕소(王昭·제4대 임금 광종)였다. 왕규는 왕요와 왕소가 반역을 꾸미고 있다고 참소했다.

그러나 왕규의 의도를 꿰뚫어보고 있던 혜종은 오히려 왕요와 왕소를 더욱 후하게 대했다. 나아가 자신의 딸을 왕소와 결혼시켜 왕요, 왕소에 대한 총애를 내외에 과시했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왕규는 아예 혜종을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혜종 2년(945)의 일이다. 사람을 시켜 혜종의 침실로 침입케 한 것이다. 그러나 잠에서 깬 혜종이 침입자를 한손에 때려눕혔다. 태자로 있을 때 아버지 왕건을 도와 군공(軍功)을 세운 바 있던 혜종이었다.

여기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은 왕규를 대역죄(大逆罪)로 다스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정 안팎에 포진해 있는 왕규의 세력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해 가을 혜종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고려사'는 정종이 즉위한 직후 왕규가 역모를 꾸미다가 잡혀 죽었다"고 짧게 전하고 있지만 정황으로만 보아도 왕규 진영과 정종 진영의 엄청난 권력투쟁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양 진영의 갈등 속에서 뜻밖의 첫 희생자는 박술희였다.

태조와 혜종 시절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박술희의 제거는 양측의 공통된 이해관계였기 때문이다. 박술희가 제거되자 정종은 일찍부터 서경(평양)에 기반을 둔 왕식렴과 연계를 갖고 있다가 일거에 왕규 세력을 초토화시켰다.

당시 처단된 왕규의 도당만 해도 300여명이었다고 하니 '원조 외척' 왕규가 얼마나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개국 초 고려왕실은 왕건 사후 바람 앞의 등불신세였다. 그나마 왕실이 다시 중심을 잡게 되는 것은 949년 정종의 친동생인 광종이 집권하면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