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스크랩] 경복궁(조선왕조 제일의 법궁)

화이트보스 2009. 9. 8. 10:17

 

 경복궁의 흥예문이며 흥예문 앞에서는 매일  하루에 몇 차례식 수문장 교대의식을 보여주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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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景福宮)

 

한양의 중심이었던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한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이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진 한양(서울)의 중심이었다.   이후 확장과 중건을 거듭하다가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되고 말았다.  그 후 경복궁은 270여 년간 복구되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1867년에 이르러서야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하였다.  중건한 경복궁은 33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이 정무를 보던 외전과 관청들, 왕족과 궁인들의 생활을 위한 내전들, 휴식을 위한 정원 시설들을 조성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세운 건청궁  등 크고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들어선 궁궐 복합체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권의 상징이었떤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때 계획적으로 훼손되었다.  1911년에 경복궁 부지의 소유권은 조선총독부로 넘어갔으며,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주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90%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조선물산공진회를 계기로 일제는 경복궁을 본격적으로 파괴했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 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했으며, 내전과 동궁 권역도 제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경복궁의 명칭 : 경복궁은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3년 지난 후 완공되었다.  완공된 지 며칠 후에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의 명에 따라 경복궁이라는 궁궐 이름을 비롯해 강녕전, 교태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이라는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 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임진왜란과 경복궁 화재의 원인 :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두 불타 버리는 비운을 겪는다.(선조수정실록)에는 왕실과 조정이 서울을 떠나자 성난 백성들에 의해 '도성이 불탔다'는  1592년 4월 30일자 기사가 실려 있다.  이와 달리<선조실록> 5월 3일자 기사에는 왜군의 동태를 기술하면서 '이때 궁궐이 불탔다'고 되어 있어 경복궁 화재의 시점과 원인에 대해 엇갈린 기록을 보이고 있다.   당시 일본 장수  오제키의(조선정벌기) 5월 3일자에는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궐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었다. (중략)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라고 적혀 있어, 왜군이 들어오기 전에는 궁궐이 보존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의 상황과 문헌자료에  근거해 볼 때 화재의 원인을 백성들이 아니라 왜군에게서 찾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고 하겠다.

 

 

 

 

사진들은 클릭하면 모두 좀더  자세히 보임!                                                 흥예문

 

 

 흥예문을 들어서면  근정전을 들어가기 전에 근정문이 보인다.

 

근정문을  가려면  인공으로 만든 수로 위에  영제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그 영제교의 '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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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문을 지나면 근정전 국보 제 223호   

근정전은 경복궁의 으뜸 전각인 법전(法殿, 正殿)으로, 그 이름은  '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는 곳'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궐 안에서 가장 장엄한 중심 건물로 왕권을 상징하며,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 외국 사절의 접견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근정전은 2단의 월대(궁궐 전각 앞에 놓인 섬돌) 위에 다시 낮은 기단을 만들고 2층 건물을 올렸는데, 안에서 보면 층 구분이 없는 통층이다. 회랑으로 둘러싸고 평평한 돌을 깐 근정전 앞마당이 바로 조정(朝庭)이다.   남쪽 회랑에 근정문을  두어 정문으로 삼았고 그 바깥에 다시 외행각을 둘러 또 하나의 마당을 조성했으며, 외행각 남쪽에는 정문인 흥례문을 내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근정문 바깥 영역을 철저히 파괴했으나. 2001년 흥례문과 외행각, 영제교 등을 복원하여 제 모습을 되찾았다. 근정전은 국보 제 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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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정전 내부  중앙 뒷쪽에 임금이 앉았던 용상과 앞에 놓여진 여러 물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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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사진에 자세한 설명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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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 안에 동쪽 문 입구에 있는 칠보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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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의 마당, 즉 조정(朝庭)에 깔려 있는 화강암은 햇벷으로 인한 눈부심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다듬었다.  조정 한가운데  주변보다  약간 위로 올라온 길은 어도(御道)라하여 왕만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어도 좌우에는 신하들이 직급별로 도열하기 위한 품계석을 세웠다.   근정전 기둥과 월대 쪽 박석에 동그란 쇠고리가 박혀 있는 것은 왕과 관원들이 조정에 모여 있을 때 햇빛이나 비를 가려 줄 천막을 치는 데 사용했던 것이다.

 

                                   월대의 구성과 시설물                                     사진들은 클릭하면 모두 좀더  자세히 보임!

근정전 두 층의 월대 위에는 난간을 두르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四神)과 십이지신 등을 조각해 놓았다.  이는 근정전의 위상과 격식을 보여 주는 것이다.  동물상은 근정전과 왕실을 지키는 신령스러운 동물들이며, 민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학과 친근함, 인간미가 느껴진다.  .

 

 

 

 

 

 기단 좌우 양 끝에는 향로와(사진 오른쪽 2시 방향에 있는 것 )비슷한 물건이 있다.    이는 청동으로 만든 세 발 솥, 즉 정(鼎)으로 왕권을 상징하고 , 더불어 백성들이 하늘의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상징물로 쓰였다.   

 

 

  궁궐의 주요 전각에 넓적하게 생긴 큰 독 '드므'를 설치하고 그 안에 물을 담아 놓았다.  하늘의 (火魔)가 그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놀라서 달아나라는 뜻이라 전해진다.

 

 회랑

 

 

 낮은 담장 안에는 많은 전각들이 있음                사진들은 클릭하면 모두 좀더  자세히 보임!

 

 

 담장 안에 전각중 일부

 

 

자경전

흥선대원군이 선물한 대비전 : 헌종(24대 임금)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는 고종(26대)의 즉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조 대비의 거처를 궐 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세심하게 만들어 은혜에 보답했다.   '자경'이란 이름은 정조가 즉위하면서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자경당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 의미는 왕이 어머니나 할머니 등 왕실의 안어른께 경사가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두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에 재건하여 경복궁 침전의 전각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 건물이다.

자경전 일원은 남향인 자경전을 중심으로 서북쪽에 복안당을 , 동쪽에 청연루와 협경당을 연결한 복합 건물군이다. 복안당에는 온돌을 들여 겨울용 침전으로, 청연루에는 누마루를 설치해 여름용 거실로 삼았다.  서쪽 담에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문양들과 갖가지 꽃나무들을 새겨 넣어 최고의 감상용 꽃담을 만들었다.    또한   뒤편에는 대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굴뚝을 설치했다.

 

 

 십장생 무늬 굴뚝 보물 제 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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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경전에는 온돌방을 많이 마련했든데, 각 방들과 연결된 10개의 굴뚝을 모아 북쪽 담장에 하나의 큰 굴뚝을 만들었다.    땅 밑으로 난 연기 같은 전벽돌  담장과 그 앞으로 한 겹 내밀어 쌓은 벽 사이로 이어져 있다.  굴뚝 벽면 중앙에 십장생들을 묘사하고 , 위 아래로 학과 불가사리, 벽사상 등을 배치하여 악귀를 막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굴뚝의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조형미가 빼어나 조선시대 궁궐 굴뚝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향원정           사진들은 클릭하면 모두 좀더  자세히 보임!

 

 

경복궁 풍기대    보물 제 847호

조선시대에는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재는 장치로 풍기를 사용했는데, 이 유물은 풍기를 꽂았던 팔각형 기둥대로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풍기대에는 풍기를 꽂는  구멍이 있다.   그 구멍에는  물이 고이지 않게 구멍을 뚫어 배수구를 만들었다.   아래  단의 높이가 80.8cm. 위의 팔각 기둥의 높이가 143.5cm.이고  전체 높이가 224.3cm.이다.

세종 때 이후 측우기로  강수량을 측정하고 강과 개천의 수량 재는  등 여러 가지 관측 기술이 발달했다.   언제부터 풍기로 풍향과 풍속을 측정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적어도 18세기까지 실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 풍기대도 18세기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의 그림인 동궐도에도 풍기대 위에 길게 나부끼는 풍기가 그려져 있어서 당시의 면모를 짐작 할 수 있다. 풍기의 정확한 크기 등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 풍기로 바람의 방향의 방향은 정확히 알 수 있었지만 바람의 세기를 정확하게 알기는 어려웠다.  당시 서울의 주요 궁궐과 관상감에는 풍기대가 있었음이 확실한데 남아 있는 유물은 창경궁 풍기대와 더불어 2점뿐이다.

 

 

 

함원전 

 경복궁 내전 깊숙히 위치해 주로 불사(佛事)를 행하던 함원전도 세종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왕조는 유교 국가인데도 세종 등 여러 왕과 왕비가 불교에 심취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몇 차례의 소실을 거쳐 1888년(고종 25)에 복구되었으나 경복궁의 다른 내전들과 마찬가지로 1917년의  창덕궁 대화재  이후 일제가 창덕궁 재건을 위해 뜯어 갔다.  현재의 건물들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경회루를 향해 가는 길에 이쁜 외국인들이 우리 옷을 입고 좋아라  하는 모습이 이뻐서 얼른 한 장 ~~

 

 경회루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 미학의 절정 :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주재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과 궁궐의 장엄한 경관을 감상하는 왕실 정원으로 꾸몄다.   창건 당시 작은 누각이었던 경회루는 1412년(태종 12)에 연못을 크게 확장하고 누각도 큰 규모로 새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불타 돌기둥만 남은 것을 1867년에 재건하였다.    경회루는 정면 7칸 , 측면 5칸의 중층이며, 넓이 931m^2의 대규모 목조건물이다.   1층은 48개의 높은 돌기둥들만  세우고 비웠으며 , 2층에 마루를 깔아 연회장으로 이용했다. 마룻바닥은  3칸 중앙 부분이 가장 높고,  그 다음 12칸은 한 뼘 정도 낮고, 바깥쪽 20칸은 다시 한 뼘쯤 더 낮은데, 중앙으로 갈수록 높은 품계의 관료들이 앉았다.  경회루는 주역의 원리에 기초하여 지었다는 옛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중앙의 3칸은 천지인을, 12칸은 1년 열두 달을, 바깥에 있는 24개의 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한다.  높낮이 경계 부분에는 분합문(위쪽으로  들어 여는 문 ) 창호가 달려 있어 창호를 내리면 각각 닫힌 방이 된다.  추녀마루에는 우리나라 건물 가운데 가장  많은 11개의 잡상(雜像. 지붕 위 네 귀에 여러 가지 神像을 새겨 넣은 장식 기와)이 있다.   재건 당시에 청동으로 만든 두 마리 용을 연못에 넣어 물과 불을 다스리게 했다 하며,  1997년 준설공사 과정에서 출토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경회루 옆면

 

 

 수정전(修政殿)

왕실 업무를 위한 관청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던 관청들을 궐외각사라 하고, 궁궐에 들어와 있는 관청들은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근정전 서쪽에 위치한 궐내각사는 크게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 교서관 등은 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정치행정기구였다.  내반원, 상서원, 상의원, 사옹원, 사복시 등은 왕족의 생활과 활동을 보좌하던 실무 관서였다.  흠경각. 보루원, 관상감,  간의대 등은 천문과 시각을 관측하는 과학 부서였고, 도총부, 내병조, 선전관청, 충장위 등은 궁궐 수비와 왕족 경호를 맡은 군사 부서였다.   이 가운데 현재 유일하게남아 있는 수정전은 세종 때 한글 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으로 쓰였던 곳이다.    1867년 재건된 이곳은 왕의 출입이 빈번하여 관청 건물로는 드물게 정면에 월대를 두었다.  재건된 수정전은 일상 집무공간으로 사용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내각 본부인 군국기무처로  사용하기도했다.  궐내각사는 수정전 앞 빈 터에 밀집되어 있었는데,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완전히 철거되었다.

 

 

 수정전옆에는  '고궁에서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매점이 있고 그 옆엔  고정된 옷모형에 얼굴만 내밀고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 놓은 곳에서 일본 아가씨들  서투른 한국어로  지나는 한복입은 도령에게 '오빠! 사진좀 찍어주세요!"  한다.  ㅎㅎ

 

 

 

 

 

출처 : 나무사랑
글쓴이 : 나무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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