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출간
폭탄 테러 사건에 연루돼 일본으로 망명한 고영근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핵심 인물인 우범선이 일본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에게 접근했다.
시해사건이 있은 지 8년이 지난 1903년 11월 24일 오후 7시께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시의 자택에 우범선을 초대한 고영근은 하인과 함께 우범선의 목과 턱 주위를 여러 차례 찌르고 머리를 쇠망치로 때려 살해했다.
“오호 통재라, 을미사변 때 우범선은 국모(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사체를 태우는 극역대악으로 천하의 공분을 샀도다. 대한의 신하 된 몸으로, 하늘을 같이할 수 없어 오늘 일본 히로시마 현 구레시에서 원수를 갚음을 위에 아뢰고 아래에 알린다”
고영근은 조선의 대신들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에 자신의 살인 동기를 이렇게 적었다. 그는 편지를 지니고 경찰에 곧바로 자수했다.
기자 출신인 이종각 일본 주오대학 겸임강사가 쓴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동아일보사)는 일본 외교문서와 당시 일본 신문 보도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파헤치고 시해에 가담한 우범선을 고영근이 살해한 배경과 이후의 재판과정 등을 살핀 책이다.
조선훈련대 제2대대장이던 우범선은 1895년 10월 8일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로 일본 낭인 등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려 경복궁에 난입할 때 병력을 이끌고 동참했다.
우범선이 훈련대 병력을 동원했기에 일본의 명성황후 제거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으며 우범선은 명성황후의 시체를 태우고 매장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고영근에 대해선 그가 일본에 망명하고 나서 궁핍한 망명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객으로 나섰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고영근이 우범선을 살해한 뒤 고종은 일본 측에 고영근을 선처해 달라고 부탁했다. 고영근은 5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1909년 한국으로 돌아와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홍릉의 능참봉이 된다.
능참봉으로 있던 고영근이 조선총독부 몰래 홍릉의 능비를 세운 이야기, 우범선의 아들인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최초 개발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사연 등도 흥미진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