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일본 경제를 죽였나
'잃어버린 10년' 후 또다시 디플레이션 선언 왜…
"따라잡기 정신에 사로잡혀 새 환경 적응 못한 비만 공룡"
올 3분기(7~9월) 세계 경제는 미약하나마 회복세를 보이며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일본은 3분기 성장률이 전분기 대비 0.3%(연율 기준 1.3%)에 그쳐 2분기의 0.7%보다 둔화됐다. 전년 동기 대비로는 -5.5%로 G7 중 가장 낮다. 9월 소비자물가는 -2.2%를 기록, 일본 정부는 지난달 20일 일본 경제가 '완만한 디플레이션 상황'에 있다고 선언했다. 지난 2006년 8월 이후 3년여 만에 일본은 또다시 '디플레이션 경제'로 잠수했다. 세계 주요 경제 중 디플레이션을 공식 선언한 것은 일본이 유일하다.
최근 삼성경제연구소는 "올 4분기 이후 일본 경제에 '더블 딥(이중 침체)'이 닥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그 이유는 ▲지난 2분기에 제조업 설비 투자가 급감(-32.0%)하는 등 공급 과잉 우려로 기업들의 투자가 부진하고 ▲올 7월 실업률(5.7%)이 반세기 만에 최악을 기록하는 등 고용 상황은 날로 악화되며 ▲정부가 떠받쳐온 정책 효과는 점점 소진되는 등 악재(惡材)가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이후 일본 경제의 짧은 회복세는 제로 금리와 대규모 재정 지출 등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은 덕분인지 모른다. 일본은 지난 40년간 유지해온 '세계 2위의 경제 대국' 타이틀을 내년, 늦어도 2011년 중국에 빼앗길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일본 경제가 여전히 '거함(巨艦)'임에는 분명하다. 일본의 경제 규모(2008년 명목 GDP 기준 4조9106억달러)는 우리나라(9291억달러)의 5배가 넘는다. 2007년 기준 일본의 특허 등록건수(16만4954건)는 미국(15만7283건)을 앞지르고 세계 1위를 기록할 정도로 기술 강대국의 지위에도 변함이 없다.
게다가 일본은 1980년대 후반 이후 세계 최대의 순대외채권국 지위를 유지해왔다. 해외 자산에서 나오는 순소득만도 연간 1500억달러에 달한다. 지난해 말 금융위기로 한국 금융시장이 휘청거릴 때도 일본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엔 스와프 계약을 해달라고 일본에 손을 내밀어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이 변화와 성장의 모멘텀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일본 경제는 1990년 버블 붕괴 이후 사실상 성장이 중단됐다. 1992~2008년 16년간 연평균 1.1% 성장했지만 명목 GDP는 483조엔에서 479조엔으로 오히려 줄었다. 물가가 하락하면서 실질 GDP가 높아진 것 같은 착시(錯視)효과에 불과하다.
일본 경제는 비대해진 공룡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고미야마 히로시(小宮山宏·64) 미쓰비시총연구소 이사장(전 도쿄대 총장)은 Weekly BIZ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1968년 세계 2위 GDP를 달성한 뒤에도 '따라잡기 정신'이 깊이 박혀 새 시대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잃어버린 10년을 겪었지만 일본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다. '인구 오너스(onus·생산 연령 인구가 급속히 줄고 고령 인구가 급증하는 현상)'문제와 과도한 재정 적자는 그대로이고, 최근엔 엔고(高)현상이 가세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오랫동안 일본에서는 '경제 1류, 정치 2류'라고 정치인을 비웃었지만 최근에는 경제계도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자신감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50년 만에 큰 폭의 적자를 기록했다.
전통적인 기술 중시와 오타쿠의 문화로 인해 일본이 세계 시장과 눈높이가 다른 고비용 제품을 내놓는 '이노베이션 딜레마'와 '갈라파고스 경제'에 빠지고 말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의 문제는 무엇인가? Weekly BIZ가 일본 경제의 미스터리를 고미야마 히로시 미쓰비시총연구소 이사장과 이케오 가즈히토(池尾和人) 게이오대 경제학부 교수,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등 세 전문가의 눈을 통해 들여다봤다.
"변화를 망각한 일본… 잃어버린 10년 아닌 잃어버린 40년"
고미야마 히로시 미쓰비시총연구소 이사장
고미야마 히로시(小宮山宏·64) 미쓰비시총연구소 이사장(전 도쿄대 총장)은 일본 사회에서 대표적인 ‘변화 전도사’로 통한다. 그는 책 〈용기를 갖고 선두에 서라〉에서 일본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일본이 지금이라도 글로벌 무대에서 당당히 목소리를 내면서 환경, 에너지 등의 분야에서 주도권을 잡으라고 촉구했다. 최근 방한한 그를 Weekly BIZ가 1시간 30분 동안 만났다.
■용기와 창의적 능력이 부족
고미야마 이사장은 “경제위기로 사회가 어려워지자 많은 일본인들이 변화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지만 조직화된 분위기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몇달 새 상황이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아직도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그리고 일본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일본의 잠재력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한마디로 산업 전반의 능력치가 높다”는 것이다. “철(鐵)이나 시멘트를 만드는 능력만 해도 일본과 한국은 일류다. 자동차 연비도 일본 차는 단연 세계 최고다. 두 사회 모두 교육 레벨이 매우 높아 인재들의 능력도 뛰어나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 사회는 이런 잠재력을 바탕으로 용기 있게 과제에 도전해서 닥쳐오는 과제들을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이것이 그가 지적하는 일본의 첫 번째 문제다.
“일본은 선진국을 본떠 산업을 키워 왔다. 하지만 선진국이 되면서 새로 나타나는 과제를 해결하려면 그것과는 다른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본엔 그것이 부족하다.”
그는 일본에서는 기업가 정신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결여돼 있고, 실패가 허용되지 않아 벤처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메이지시대부터 따라잡기를 계속해 와서 그런 것이지, 원래 일본인의 유전자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는 일본 젊은이들이 현실 안주적인 성향으로 변한 데는 “어른들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용기를 보여주고 실천하는 어른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는 영어에 굉장히 약했다. 도쿄대 총장 시절 ‘국제화를 하라’고 얘기하니, 당장 ‘총장부터 일본어로만 얘기하면서 무슨 국제화냐’는 비판이 학생들 사이에서 나왔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앞으로 나서서 나를 (영어로) 드러냈다. 일본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종류의 ‘실천’이 굉장히 적어졌다는 것이다.”
■토론을 통한 통합적 사고의 부재
고미야마 이사장이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지식의 통합’이다. 그는 “이번 글로벌 경제위기는 지식이 너무 많아져 ‘전체상(全體像)’을 아무도 파악할 수 없게 된 데도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지식의 통합과 이종(異種) 학문 간의 토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금융위기 이후를 꾸려갈 산업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 일본 경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그런데 이런 큰 문제를 해결하려면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셜록 홈즈 소설을 보면 홈즈라는 천재가 순간적인 ‘번득임’으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해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천재가 아닌 보통사람들이 그런 ‘천재의 번득임’을 만드는 방법은 이종(異種) 학문간의 토론에서 나온다.”
고미야마 이사장은 그러나 “일본에 특히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논의의 장(場)”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사회는 무언가를 시키면 그대로 하는 상의하달(上意下達) 의식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어 논의하는 풍토를 조성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환경 리더십에서 주도권 잡아야
고미야마 이사장은 일본이 ‘따라잡기’에서 벗어나 글로벌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구촌의 과제에 대한 해결 모델을 앞장서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기후 변화가 세계적 의제가 된 이 시점에 ‘환경 리더십’을 강조했다.
자원이 빈약한 일본으로서는 환경·에너지문제가 가장 시급한 문제이며, 또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분야라는 것이다. “금방 오염될 수 있다는 상황이 환경산업에서는 오히려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될 수 있다. 변화를 가장 먼저 포착하는 기업과 나라가 ‘톱 오브 톱(top of top)’으로 올라설 것이다.”
- ▲ 그래픽=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중요한 것은 변화의 의지를 가진 이들이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라고 고미야마 이사장은 강조했다. 고령화나 환경 같은 큰 문제는 한 분야만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각 분야의 심화된 연구를 연결시키는 ‘허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변화 전도사’로 불리는 고미야마 이사장은 스스로의 이력 자체가 여러 단계에 걸친 ‘변신’의 산물이다. 원래 그는 박막 연구 분야의 세계적인 화학공학자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환경 전도사로 나서서 “2050년까지 일본 사회의 에너지 효율을 3배로 높여야 한다”는 ‘비전 2050’을 설파했다.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그의 주장이 쉽게 파고들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실천의 힘으로 난관을 극복해왔다. 가령 주택의 에너지 효율을 대폭 개선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지난 2002년 직접 ‘에코 하우스(절전형 친환경 주택)’를 만들어 생활했다. 그의 집은 태양열 전지를 통해 전기의 60%를 자급한다.
지난 2005년 도쿄대 총장이 된 뒤 도쿄대에도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100회 이상의 논의를 거쳐 21세기 대학 모델을 구현할 로드맵을 작성해 실행했다. 최첨단 연구를 반영하는 교양 과목 커리큘럼 개편, 학술 통합화 프로젝트 등이 그 일환이다.
"기술 '오타쿠'가 독주… '갈라파고스 경제'에 빠져"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현장의 우위를 살리지 못하는 전략 부재(不在)
이렇게 막강한 제조업 기반 위에 서있으면서도 일본 경제가 휘청대는 이유는 뭘까?
문제는 효과적인 비즈니스모델을 구축해 기술적 강점의 부가가치를 제고시키는 전략력, 기획력이 구미 선진 기업에 비해 부족하다는 데 있다. 글로벌 경영 환경에서는 강한 기술력이 고수익으로 연결될 수 있게 만드는 전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장 상황에 따라 때로는 일전을 불사하고, 때로는 손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이런 측면에서 뒤떨어진다.
일본 부품업체 중에는 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는 기업도 많다. 하지만 미국의 인텔 사(社)처럼 높은 수익률을 내지는 못한다. 완성품 업체도 비슷하다. 소니는 자신의 아성이었던 개인용 음악 장치 시장을 애플에 내줬다. 애플은 하드웨어 제조 분야에서는 뚜렷한 강점이 없고 아웃소싱에 의존한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소프트웨어 개발력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수많은 콘텐츠 기업을 활용하는 개방형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했다.
일본 기업의 경우 CEO가 현장은 잘 파악하고 있지만, 현장의 강점을 활용하는 글로벌 마인드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일본 제조업체는 기술자 출신의 경영진이 대부분이다. 우수한 기술자가 경영진으로 승진해가는 기업 문화를 갖고 있다. 이로 인해 경영을 잘 모르는 ‘기술 오타쿠(한 분야에 깊게 파고드는 마니아)’가 경영진이 되어 방대한 조직을 운영하는 바람에 비효율을 낳고, 현장은 현장대로 2류 기술자만 남게 된다는 비판이 일본 내부에서 나온다.
일본기업 중에는 고객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기술을 완벽하게 실현하겠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고(高) 비용 제품을 만드는 바람에 세계 시장에서 외면당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인구 1억 2700만명에, 1인당 국민 소득이 3만 달러를 넘는 일본 시장에서는 ‘기술 오타쿠’ 전략이 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 오타쿠’를 지나치게 좇는 바람에 세계 시장과 눈높이가 잘 맞지 않게 되고 고립된다. 이런 일본 기업의 모습을, 대륙과 떨어져 독특한 생태계를 형성한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섬에 비유하는 자기 비판의 목소리가 일본 재계에 높아지고 있다.
- ▲ 그래픽=박상훈 기자 ps@chosun.com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미국·유럽 등 선진국 경제가 크게 타격을 입고, 앞으로는 신흥시장의 중산층이 세계 시장을 주도할 것으로 예견되면서 글로벌 기업들이 여기에 초점을 맞춰 경영 전략을 짜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일본 기업이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일본 내에서 높아지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과거의 성공에 집착하다 개혁 모멘텀 상실
오랫동안 일본에서는 ‘경제 1류, 정치 2류’라고 정치인을 비웃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경제계도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자신감을 상실했다.
고도 성장기 이후의 사회·경제 시스템을 고령화 시대에 맞게 전환하면서 성숙된 고소득 국가로 개혁하는 작업은 정부나 기업의 전략적 대응을 필요로 한다. 정치와 경제계 모두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비전을 갖고 혁신을 주도해야 하는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일본은 미(美) 군정이 국가 전략의 기본 틀을 정했다. 일본 정치가의 역할은 그 틀을 전제로 일상적인 전술 수준의 정책을 조정하는 데 머물렀다. 구 자민당 정권은 그런 정치가들을 양산했다. 그들은 기득권을 보호하면서 고도 성장 경제의 성과를 무리 없이 나누는 데 능숙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정치는 고도 성장이 마감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경제적 파이를 키우려면 일부 기득권을 희생하더라도 과감한 구조조정 및 개혁이 필요하다. 1980년대 이후 개혁의 필요성은 계속 제기돼 왔다. 그러나 일본 정치는 개혁을 외면했다. 1990년대 중반 자민당이 일시적으로 정권을 빼앗기기도 했지만, 곧바로 정권에 복귀했다. 이렇게 개혁이 20년 이상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일본 경제의 체력을 떨어뜨렸다.
물론 2차대전 이후 고도 경제 성장과 세계 최대 순채권국으로의 부상 등 구 자민당 정권의 업적은 크다. 하지만 이 때문에 과거의 성공 모델을 고집하려는 성향이 일본 정치는 물론 국민들, 그리고 경제계에서도 고착되었다. 그 결과 과거의 성공 모델을 고집하면서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고 결단 내리지 못하는 구조가 일본 경제계에 만연하게 된 것이다.
■하토야마 개혁이 새 희망을 줄까
현장은 강하지만 전략이 약한 것은 2차대전 당시 일본군(軍)의 문제이기도 했다.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해 미일 전쟁이라는 큰 전략적 실수를 범했을 뿐 아니라, 주요 전투에서도 패전(敗戰)했다. 세계 최강의 생산 시스템을 자랑하던 도요타 자동차가 글로벌 위기로 큰 폭의 적자로 돌아선 것도 ‘강한 현장, 약한 전략’의 오류를 보여준다. 미국 시장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무리한 확장 정책을 쓴 반면, 신흥시장에서는 경쟁 기업에 뒤지는 ‘전략의 실패’인 것이다.
- ▲ 그래픽=박상훈 기자 ps@chosun.com
하지만 최근 일본은 그런 외부 모멘텀도 없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 과정에서도 일본은 세계 최대의 순대외채권국이기 때문에 외부의 쇼크를 차단할 수 있었다. 결국 한국처럼 외부 경제로부터의 충격을 활용해 개혁의 모멘텀을 높이기도 힘들다. 약(藥)이 오히려 독(毒)이 되는 경우다.
최근 하토야마 민주당 정권이 출범했다. 이 정권이 각 분야의 기득권을 제로베이스로 재검토하면서 과감한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민주당 정권은 물론 일본 경제에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고령화에 발목잡힌 '인구 오너스<onus>'경제… 세대간 불평등 커져"
이케오 가즈히토(池尾和人) 게이오(慶應)대 경제학부 교수
이는 두 가지 의미에서 일본 수출산업에 순풍(順風)이 됐다. 첫째, 북미(北美) 시장이 수요를 증대시켰다. 둘째,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메우기 위한 자본 이동이 과도한 엔저(低)현상을 초래했다. 이 두 요인이 일본 수출형 제조업의 활황을 가져왔고, 일본 경제의 회복을 이끌었다. 요컨대 2002년 이후 일본 경제의 부활은 미국의 과잉 소비 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출형 제조업과 내수형 제조업의 2부문 경제
미국발 금융위기의 발발을 계기로 글로벌 불균형이 조정되고 있다. 이미 불균형 규모가 위기 전의 절반으로 축소되고 있다. 일본의 수출형 제조업은 두 가지의 순풍이 역풍(逆風)으로 바뀌는 와중에 급격히 실속(失速)했다.
다시 말해 지금 상황이 일본 경제의 진정한 실력이고, 지금의 경제 사회구조하에서는 미국의 과잉 소비 같은 요행이 생겨나지 않는 한 일본 경제의 향상을 기대하기도 힘든 것 아닐까? 자동차 판매를 예로 들자면 위기가 끝난 뒤 북미 시장 규모가 1000만대 수준은 회복할지 몰라도 예전처럼 1600만대를 팔 상황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이번 위기에 일본이 겪는 많은 현상은 일시적이 아니라 항구적이라고 봐야 한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추세적으로 상승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 경우의 최대 문제점은 수출형 제조업에 비해 일본 서비스산업의 생산성(수준 및 증가율)이 낮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선 다시 ‘모노즈쿠리(혼이 담긴 고도의 제조능력)’ 중심으로 가자는 희망이 강하지만 이 역시 곤란하다고 판단된다.
불황은 물건이 팔리지 않는 상황을 의미하므로 현상적으로 ‘수요 부족’으로 특징지어진다. 예를 들어 브라운관 비디오를 100만대 만들 수 있는 생산 설비가 있고, 그것을 풀 가동하기에는 수요 부족인데도 공급을 확대하는 정책이 과연 적절한가? 답은 ‘아니요’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일본의 수출형 제조업은 과잉 설비를 안고 있다. 규모의 축소가 요구된다.
북미 시장에 의존해 온 수요를 아시아 등의 신흥시장으로 대체하려고 해도 신흥시장 대상 제품은 선진국 시장처럼 ‘고기능-고가격’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일본 경제는 오랜 기간 ‘2부문 경제’의 양상을 보여 왔다. 한 부문은 수출형 제조업이고, 다른 하나는 내수형 제조업과 비제조업이다. 전자는 국제적으로 볼 때도 생산성이 높지만 후자는 2002년 이후에도 낮은 생산성에 머물러 왔다. 이런 문제를 덮어서 가려 왔던 수출형 제조업이 (적어도 국내에서는) 규모를 축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내수 산업의 활성화 없이 일본 경제는 침체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 ▲ 그래픽=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일본은 ‘인구 오너스(onus·생산 연령인구가 급속하게 줄고 고령인구가 급증하면서 성장세가 둔화되는 현상)’ 시대로 접어들었다. 경제성장률은 노동생산성 상승률에 노동인구 증가율을 더한 것으로 정의된다. 향후 일본의 노동인구 증가율은 추세적으로 볼 때 마이너스 0.7~1%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1%의 경제성장률을 실현하려면 노동생산성이 2% 정도 증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잠재적인 수요에 대응해 공급구조를 현대화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일본의 인구 변화에 대응해 의료·건강·간호산업 같은 분야에 잠재 수요가 확대되고 있지만, 공급체제가 대응하지 못해 ‘공급 부족’이 심각해지고 있다.
따라서 의료·건강·간호산업 같은 분야를 포함해 내수 산업의 생산성을 개선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노동생산성의 향상에 기여하는 요인은 첫째 자본장비율의 향상(자본 축적), 둘째 이노베이션(혁신), 셋째 자원 배분의 개선이다. 이 세 가지 모두 최대한의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자본장비율의 향상과 관련해서는 IT(정보기술) 등을 한층 활용하는 것이 요구된다.
둘째, 이노베이션과 관련해서는 자연에너지의 대량 도입과 그 이용(전기자동차 등)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현재 일본 기업이 우위를 갖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 이점을 계속 살려나갈 수 있을지가 걱정스럽다. 무엇보다 시스템적 사고나 정책 구상력이 부족하고, 미국에 비하면 시장 규모도 적다.
또한 ‘스리아와세(고객 맞춤형 생산방식)’ 기술의 우위를 잃고 ‘모노즈쿠리(혼이 담긴 고도의 제조능력)’가 패전(敗戰)할 가능성도 있다. 전기자동차를 예로 들면 그 구조가 기존 가솔린 엔진보다 현저히 간단하다는 게 일본에는 문제다. 도요타의 프리우스는 병렬 하이브리드 자동차인데, 매우 복잡한 구조여서 일본의 강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반면 직렬 하이브리드방식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자동차(PHV)나 전기자동차(EV)는 구조가 비교적 단순해 일본의 기술력이 별로 빛을 발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디지털 가전산업에서 일본의 종합 가전 메이커들이 고전하는 것의 재판(再版)이 될 수 있다.
■후세에 부담 떠넘긴 고령 사회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득권의 벽을 부수고 구조 개혁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치의 기능 저하가 일본 경제의 신진대사를 저해하고 침체를 초래하고 있다.
일본의 현실을 보면 분배할 자원이 없는데도 ‘소득 재분배형’ 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그 부담은 모두 장래 세대에게 떠넘겨져 이미 거대한 세대간 불평등을 낳고 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세대에게 ‘마이너스 연금’의 부담을 떠맡기는 나라인데도 국채(國債)가 세수(稅收)를 웃도는 상황을 어떻게 개혁할지에 대한 논의가 없다. 일본인은 레거시 코스트(legacy cost·퇴직자들에게 제공되는 연금 및 건강보험 등의 혜택)로 고전하다가 파탄으로 치달은 GM을 비웃을 자격이 없다.
일본이 비교 우위를 가진 저탄소 혁명을 성취한다고 해도 그 성과가 나타나는 것은 2030년대 이후로 전망된다. 그 이전의 2010년대, 2020년대에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훌륭한 지혜를 짜내고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면 ‘인구 오너스의 시대’에 일본은 서서히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