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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고아 버린 나라, 추모 동상도 버리다앤드루 새먼 더타임스지 서울특파

화이트보스 2010. 1. 12. 11:10

전쟁고아 버린 나라, 추모 동상도 버리다

입력 : 2010.01.11 23:03

6·25 전쟁고아들 해외 입양 보낸 한국
6·25 60주년 맞아 외국서 전쟁고아 추모 동상 보내려 해도
관심 없는 한국 국방부

1951년 1월, 얼어붙은 폐허에 세운 은신처에서 파티 준비가 한창이었다. 전장에서 싸우느라 크리스마스를 그냥 넘긴 영국군 글로스터대대가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조촐한 신년 축하연을 열어주려는 참이었다.

병사들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아이들은 누더기 차림이었다.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아이들은 추위 속에 묵묵히 서 있었다.

병사들이 피운 장작불이 타닥타닥 탔다. 공병대가 뚝딱뚝딱 만든 가짜 굴뚝을 통해 붉은 옷을 입은 병사가 약솜으로 만든 흰 수염을 달고 튀어나왔다. 병사들이 웃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아이들도 차차 따라 웃었다. 병사들이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줬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때 북쪽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났다. 포성이었다. 중공군이 임진강을 건너 남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서울에서는 미 공군 군목 러셀 블래스델이 고아원을 급조하고 고아들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미국 본토에 있는 블래스델의 부인이 아이들이 입을 옷가지를 부쳐왔다. 유엔군이 퇴각하고 적군이 밀려드는 와중에도, 블래스델은 미군 지휘관들을 미친 듯이 들볶아 아이들을 피란시킬 대책을 짜냈다. 미군 간호병들은 블래스델이 거둔 전쟁고아들의 몰골을 보고 울었다. 모두 영양부족이었다. 대부분 병들어 아팠다. 블래스델이 애쓴 덕분에 고아 950명과 고아원 직원 100명은 미 공군 군용기를 타고 무사히 제주도로 피란했다. 블래스델은 훗날 '한국의 쉰들러'라는 별명을 얻었다.

6·25 개전 초기 몇 달 동안은 아직 국제구호단체들의 손길이 채 미치지 않을 때였다. 거의 모든 유엔군 부대가 비공식적으로 전쟁고아들을 거둬서 데리고 다녔다. 한 영국군 병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전쟁고아들이 키 순서대로 올망졸망 서서 우리 부대를 따라왔다. 군복이 너무 커서 몸에 안 맞았지만 다들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제일 작달막한 아이가 맨 뒤에 서서 새끼돼지 목줄을 끌고 따라왔다."

전투병들이 전쟁고아들을 보호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병사들의 일상은 고됐고 도처에 폭력이 있었다. 병사들에겐 따뜻한 감정을 쏟을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아들은 6·25 기록사진과 예술작품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미 해군 스펜서 소령이 찍은 유명한 기록사진으로 어린 소녀가 여동생을 둘러업은 채 겁먹고 서글픈 얼굴로 탱크 앞에 서 있는 장면이 있다. 6·25 때 숨진 유엔군 병사들이 안장된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가장 감동적인 시설물도 두 아이를 데리고 있는 캐나다 병사의 동상이다. 캐나다 참전용사가 이 동상을 디자인했다.

1950~53년 사이에 전쟁의 피해를 본 어린이들은 수십만명에 달할 것이다. 총성이 멎고 평화가 오자 상황이 더 난감해졌다. 부모 잃은 아이들은 이제 대체 어쩌란 말인가? 끈끈한 가족애는 한국인의 장점이지만, 입양을 꺼리게 하는 장애물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해외 입양됐고 한동안 한국에는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이 붙어 다녔다.

나는 최근 미국 참전용사이자 어린이 보호운동가인 조지 드레이크 박사를 취재하면서, 60년이 흐른 지금도 전쟁고아들에 대한 한국의 무관심은 여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서글퍼졌다.

드레이크 박사는 멕시코 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 세바스티안(Sebasti��n)으로부터 6·25 전쟁고아들을 추모하는 조각을 기증받았다. 드레이크 박사는 6·25 60주년을 맞아 이 조각을 한국에 선물할 계획이었다. 주한 멕시코 대사관과 미국 대사관이 드레이크 박사의 결정을 반겼다. 한국 정부는 조각을 세울 공간과 운송비만 부담하면 된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한국 국방부는 심드렁했다. 국방부 담당자는 드레이크 박사의 이메일에 두 달간 감감무소식으로 답을 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나서서 드레이크 박사와 국방부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뒤에야 간신히 이메일 답장이 왔다. '고맙지만 됐다'는 내용이었다.

6·25 피해자들 가운데 가장 작고 힘없는 희생자는 전쟁고아들이었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잊힌 존재들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