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55조원… 6.5% 늘어… 7년전 ‘카드대란’때와 비슷
부동산값마저 급락하면 일본식 장기불황 빠질 우려
“금리인상전 연착륙 대책을”
- ▲ 방현철 정책·소비자팀장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의 얘기다. 정책 당국의 가계 부채에 대한 걱정이 '가계부채발(發) 금융위기 가능성'에서 '가계부채발 소비 침체 가능성'으로 바뀌고 있다.
작년 상반기만 하더라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인해 가계부채 연체가 늘면 돈을 빌려준 은행이 부실화될 것을 걱정했다. 하지만 은행들의 체력이 회복되면서 가계 부실이 어느 정도 늘어도 금융 시스템이 흔들릴 우려가 없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대신 위기 중에도 거침없이 늘어난 가계 부채가 앞으로 소비 회복을 짓누르지 않을까로 관심사가 달라지고 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저금리로 가계 부채가 늘어나면 가계에 자금 여유가 생겨 소비가 늘어나는 효과도 생기지만, 갚을 빚이 늘어나면서 점차 소비가 줄어드는 효과도 동시에 있다"면서 "이제까지는 부채 증가가 소비를 늘렸다고 보지만, 앞으로는 소비가 줄어드는 효과가 더 클 수 있다"고 말했다.
민간 연구소인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달 낸 보고서에서 "2009년에 가계부채 증가로 인한 소비억제 효과(9900억원)가 소비증대 효과(8500억원)보다 더 컸다"고 지적했다. 우리 경제는 이미 2003년 '카드 대란' 당시 가계부채발 소비 침체를 경험한 적이 있다.
◆금융위기 와중에도 늘어난 가계 빚
작년 우리 경제는 0.2% 성장했다. 그런데 개인 금융부채는 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늘어나, 802조원에서 855조원으로 6.5%(53조원)나 늘어났다. 2008년 증가액(58조원)에 맞먹는 규모이지만, 불황이라 대기업 대출도 줄고 중소기업 대출도 주춤한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가계 빚이 얼마나 심각하게 늘어났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국 등 금융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선진국들이 개인 금융부채를 줄이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미국은 작년 가계 금융부채가 13조5360억달러로, 전년(13조7729억달러)에 비해 1.7% 줄었다.
게다가 우리나라 가계는 소득이 늘어나는 속도보다 빚이 늘어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2000~2009년 개인가처분소득은 연평균 5.7% 증가한 데 반해 가계부채는 연평균 11.6% 증가했다.
◆2003년 카드 사태 때 소비 감소로 고통
갚을 능력에 비해 많은 빚을 지게 되면 소비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돈은 빌릴 당시에는 한 번에 늘어나도, 갚을 때는 오랜 시간에 걸쳐 원리금을 상환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소비를 줄이는 효과가 커진다.
이미 우리 경제는 카드 대란 당시 이런 상황을 경험했다. 2000~2002년에 가계부채는 매년 20~30%씩 증가했다. 카드사 대출이 1999년 말 23조4000억원에서 2002년 말 84조1000억원으로 급증한 것이다. 개인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도 2000년 87%에서 2002년 122%로 35%포인트나 급증했다. 당시 한국은행은 일회성 가계부채 증가로 인해 연평균 6.5%포인트의 소비가 늘어난 반면, 동시에 이자 부담으로 연평균 3~4%포인트의 소비가 줄어드는 효과가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결국 카드 부채가 꼭지에 다다라 위험 신호가 나오자 2003년 정부가 개입했다. 가계는 강한 부채 조정에 들어가면서 예년에 연 3.5%씩 늘어나던 민간소비가 2003년 마이너스 1.2%, 2004년 마이너스 0.3%로 위축됐다. 2003~2004년에 경제 성장률이 부진했던 것은 주로 가계 부채 조정에 따른 민간 소비 위축에 기인했다.
◆금리 올리기 전, 빚 많은 가계의 연착륙 필요
전문가들은 카드 사태 당시처럼 소비가 급감하는 충격을 막기 위해서는 서서히 디레버리징(deleveraging·부채 축소)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경기 회복으로 금리를 올리기 전에, 빚 많은 가계의 연착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금리가 1%p 오를 때 우리나라 가계는 총 1조3000억원의 이자 부담이 늘게 된다.
현재 정부는 당분간 금리를 올리지 않는다는 쪽에 기울어져 있다. 민간의 자생적인 회복세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금리 인상이 어렵다는 점에 정부와 한은 간의 내부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또 정책 당국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응 전략으로는 부동산값 안정이 최우선으로 꼽힌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부동산 값을 안정시키면 갚을 능력에 비해 부채가 많은 가계는 집을 팔려고 내놓고, 적은 부채를 감당할 수 있는 가계로 손바뀜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가계 부채가 감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대응 전략에도 위험은 내포돼 있다. 만약 부동산 값 미세 조정에 실패해서 부동산 값이 급락할 경우에는 민간 소비를 회복시키지 못한 채 '일본식 장기불황'으로 들어갈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정책 당국은 가계 부채가 늘어나는 속도를 면밀히 점검하면서, 자율적인 가계 부채 조정이 일어나도록 부동산 규제의 완급을 조절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