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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에서 배워야 할 것

화이트보스 2011. 7. 18. 16:07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에서 배워야 할 것

  • 김명섭 연세대 통일연구소장·정치외교학과 교수

입력 : 2011.07.17 23:29

공산정권, 準국가, 동포… 세 개의 북한 다루는 통일 鐵血의 통일의지 있어야 가능
보수는 평화통일 염원 모으고 진보는 北인권 눈감지 않아야

20년 전인 1991년 지구상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은 소련(蘇聯)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의 표현처럼 '한밤중의 도둑처럼' 닥친 소련의 종말을 미처 예측하지 못한 서방의 소련학(Soviet Studies) 연구자들도 운명을 같이했다. 이들은 냉전시기 소련이라는 '주적(主敵)'을 알기 위해 제공된 막대한 연구비의 혜택을 누렸지만, 소련의 갑작스러운 붕괴를 예측하지 못했다. 일부 소련학 연구자들은 소련이 사라지는 것 자체를 원치 않았다. 그러면 북한학 연구자들의 운명과 직결된 북한은 어떨까?

첫째, 공산주의 정권으로서의 북한이다. "악마와도 협상은 해야 한다"는 격언은 대북정책과 관련해서 자주 인용되던 말이다. 이 말의 앞을 빼고 뒤만 반복하면, 1921년 자유시 사변, 스탈린의 한인(韓人) 대학살, 6·25 남침, 그리고 최근 천안함 폭침까지 한국인들을 엄습했던 공산주의의 권력논리에 눈멀게 된다. "거짓말도 백번 하면 진실이 된다"는 것이 공산주의의 권력논리다. 간혹 사선(死線)을 넘어온 탈북민들조차 공산주의 권력의 기계적 원리를 직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자동차에는 문제가 없는데, 새로 운전대를 잡은 후계자가 문제라는 식이다. 그러나 북한정권은 스탈린, 모택동, 그리고 김일성에 의해 처음부터 잘못 설계된 자동차였다.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이었던 크메르루주 수뇌부가 자행한 '킬링 필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악한 정권이 반드시 약한 정권은 아니지만, 소련 공산정권의 최후에서 보았듯이 진실의 파도는 결국 허구의 모래성을 무너뜨리게 된다.

둘째, '준(準)국가'로서의 북한이다.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규정하는 한국헌법에 따르면 북한은 국가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1년 한국과 북한은 별개의 회원국으로 유엔에 가입했다. 한국의 헌법과 국제사회의 국제법이 어긋나는 지점이다. 남북한 동시가입은 1948년 유엔이 한국을 승인할 당시, '코리아의 유일 합법정부'라 하지 않고 '코리아에서 유엔 임시위원회의 선거감시가 가능했던 지역에서의 유일 합법정부'라고 한정했던 것에 근거한다. 1950년 6·25 남침에 대한 반격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수복했을 때, 북한지역에 대해 유엔이 최고행정권을 가졌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하더라도 한국에 앞서 중국 혹은 유엔이 개입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셋째, 동포로서의 북한이다. 현재의 북한정권이 사라지고, '준국가'로서의 북한이 지속되는 과도기적 국면이 오면, 국제사회는 북한주민의 정치적 의사에 주목하게 된다. 평화통일을 위해 북한동포를 포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북한주민이 우리보다 열등하거나, 게을렀던 것이 아니다. 단지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왔을 뿐이다. 2만 탈북민들뿐만 아니라 허구의 성채 안에 있는 2500만 북한동포가 민족사의 주류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한국헌법이 명(命)하고 있는 평화통일은 세 개의 북한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다. 흔히 친북(親北)과 반북(反北)을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이분법적 잣대로 사용하지만, 친(親)북한정권은 진보가 아니고, 반(反)북한동포적 성향의 분리주의는 보수가 될 수 없다. 진정한 보수라면 20세기 독일의 재(再)통일과 더불어 19세기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통일은 거저 오는 것이 아니다. 독일 통일이라는 지정학적 변화를 원하지 않았던 주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프러시아 주도의 통일을 이룩해냈던 철혈(鐵血)의 통일의지가 있어야 한다. 다만 19세기 독재시대의 독일과 달리 21세기 민주화된 한국에서는 지도자의 통일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평화통일을 향한 국민의 염원을 모아낼 수 있는 새로운 보수의 통일론이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8000만 중국공산당에 기대서 수백만 조선노동당과 백만군대를 호령하고 있는 북한정권을 상대로 한국 주도의 평화통일을 이룩하려면 보수의 힘만으로는 힘겹다. 새로운 진보의 통일론도 나와야 한다. 민주화의 도정에서 한국의 진보는 서구 진보의 관심에 적지 않은 빚을 졌다. 이제 북한동포에게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코리아의 높아진 최고치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인권현실은 여전히 코리아의 최저치(最低値)다. 더 이상 이 최저치에 눈감지 않는 새로운 진보의 통일론이 새로운 보수의 통일론과 경쟁하며, 천천히, 그렇지만 꾸준하게 한국의 평화통일을 만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