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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화이트보스 2011. 8. 9. 19:42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 - <난정서(蘭亭序)>의 최대 후원자
하태형 고전칼럼, 2011-08-08 오후 02:43:12  
 
역대 중국대륙을 호령한 황제들의 수는 583명이라고 합니다(<중국사 열전. 황제> 샹관핑 지음).그중 가장 뛰어났던 황제를 한명만 꼽으라면 아마도 꼽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란 인물입니다.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과 위(魏) 무제(武帝) 조조(曹操)의 기량을 한 몸에 갖췄다’고 평가받는 인물인 당(唐) 태종(太宗), 그는 어떠한 인물이었는가를 먼저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세민(李世民)은 AD 599년 1월 23일, 수(隋)나라 대장군(大將軍)인 아버지 이연(李淵)과,북쪽 선비족(鮮卑族)의 귀족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次男)으로 출생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달라서, 그의 나이 4세 때 어떤 사람이 예언하길,‘이 아이는 커서 반드시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이다(濟世安民)’라고 하였으므로 거기서 그의 이름(世民)을 따서 지었습니다.

16세에 장교가 되어 18세부터 아버지를 따라 십 년이 넘게 전쟁터를 돌아다녔으며,당(唐)이 천하를 차지하기까지 7년 동안 크게 여섯 차례의 전쟁을 치렀는데,이세민(李世民)이 그 중 네 차례를 이끌어 모두 승리를 쟁취해 냅니다.

따라서 당(唐)의 건국 과정에서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이세민(李世民)이었으나 적장자(嫡長子)를 세워야 한다는 명분에 밀려 황태자 자리는 맏형인 이건성(李建成)에게 돌아갔고,이세민(李世民)은 진왕(秦王)에 봉해집니다.

엄청난 기량을 지닌 동생이 두려웠던 태자 이건성은 넷째 이원길(李元吉)을 끌어들여 이세민(李世民)을 제거하려 하자, 그는 오히려 선수를 쳐,형과 동생을 죽이고(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 왕좌에 오르니,그가 곧 ‘정관(貞觀)의 치(治)’를 연 당(唐) 태종(太宗)입니다.

형제의 피를 뒤집어쓰며 옥좌에 앉은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그러나 그가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곧잘 평가되는 이유는 그런 과정을 거쳤을지언정 훌륭한 정치를 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는 우선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28세라는 한창 나이에 천하의 주인이 되었으니 마음을 턱 놓고 권력과 사치에 잠길 만도 하건만, 태종(太宗)은 반대로 근검절약을 생활화하고 황족과 대신들도 이를 본받도록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종(太宗)은 애써 천하를 통일했으나 2대만에 멸망한 수(隋)나라의 예를 거울삼고,집권 과정에서 흘린 형제의 피를 잊을 수 있도록 진정한 제왕의 정치를,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는 철이 들 무렵부터 전쟁터를 뛰어다니며 무인의 삶을 살았으나,태자로 책봉되고부터는 당대(當代)의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책에 묻혀서 살았습니다.

“천하는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며, 만인의 것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것을 정치의 근본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된 뒤에도 자신이 혹시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가차없이 지적하도록 간언(諫言)을 장려하기까지 합니다.(글 일부‘함규진’씨 글에서 발췌: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730)

당태종은 혼혈출신이어서 다른 민족의 종교, 문화에도 매우 관대하였으며,따라서 당(唐)의 수도 장안(長安)이 진정한 Cosmopolis가 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제도의 정비와 문화의 창달에도 힘써서,고대 신화적인 이상정치의 시대인 ‘삼대(三代: 하(夏), 은(殷), 주(周))’ 다음 가는 최고의 태평성대라 불리는 ‘정관(貞觀)의 치(治)’를 연 그는,점차 문화를 사랑하는 인문주의자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는 특히나 개인적으로 서예를 좋아하게 되는데,그중에서도 약 300년 전 인물인 왕희지(王羲之)와 그의 일곱 번째 아들인 왕헌지(王獻之),즉 이왕(二王)의 글씨를 아꼈습니다.

 
서예에 대한 대단한 정열가인 그는 <온천명(溫泉銘)>、<진사명(晉祠銘)>등의 각석(刻石) 작품을 남기기도 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 진덕여왕 2년(648년) 김춘추(金春秋) 부자가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태종이 직접 쓴 이 <온천명(溫泉銘)> <진사명(晉祠銘)>의 탁본을 선물로 받고 돌아왔다 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제4권> ‘太宗仍賜御製温湯及晉祠碑并新撰晉書’)

그는 남조(南朝)의 잦은 왕조 변혁과 전쟁 속에서 하나씩 사라져 간 서예작품을 모으기로 하고,정관(貞觀) 6년(632) 정월 8일에는 전대(前代)부터 전해 내려오던 위(魏)나라의 종요(鍾繇)와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 등의 서예작품 진적(眞蹟) 정리를 명하여 1,510권의 거책(巨冊)을 출판시킵니다.

그 자신 이때 발간한 서첩을 토대로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수없이 임서(臨書)하며 공부하다가 급기야 정관(貞觀) 13년(639)에는, 칙명을 내려 천하에 흩어져 있는 왕희지(王羲之)가 남긴 글씨들을 찾아 올리도록 명령까지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왕희지(王羲之)의 자손으로부터 봉정된 40지(紙)를 비롯하여 1,290지(紙) 13질(帙) 128권(卷)이 새로이 황실의 소유가 되게 됩니다.

하지만, 당(唐) 태종(太宗)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난정서(蘭亭序)>를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이후, 어떤 경로로 당(唐) 태종(太宗)이 <난정서(蘭亭序)>를 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설이 있는데, 일단 당(唐)나라 때 쓰인 자료로는 하연지(何延之)가 쓴 <난정기(蘭亭記)>란 글과,유속(劉餗)이 지은 <수당가화(隋唐嘉話)>란 글에 그 사연이 나옵니다.

이 두 가지 자료 중, <수당가화(隋唐嘉話)>에 나오는 내용은 매우 간략한 반면,<난정기(蘭亭記)>에는 아주 상세한 내용이 나오는 관계로,예로부터 이 <난정기(蘭亭記)>에 쓰여진 내용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따라서 후대에서는 이 글의 내용을 인용하기도 하고, 심지어 글의 내용을 그림으로도 그리기 까지 합니다.

다음시간에 이 <난정기(蘭亭記)>의 내용을 뽑아서 소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태형/고전(古典) 칼럼니스트/(주)소너지 대표이사/경제학박사(뉴욕주립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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