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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조롱하는 사회

화이트보스 2011. 12. 13. 10:22

아무나 조롱하는 사회

  • 김광일 논설위원

     

  • 입력 : 2011.12.12 23:04

     
    김광일 논설위원

    대통령, 종교인, 학자, 소설가, 판사, 기자,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아무도 누구를 향해 존경의 말을 쓰지 않는다. 마지막 보루 같았던 성직자도 대통령을 향해 서슴없이 "쥐 같다"는 표현을 쓴다. 판사도 '뼛속까지 친미(親美)' '각하에게 엿먹인다' 같은 표현으로 비웃는다. 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독일을 막으려 했던 마지노선(線)이 허망하게 뚫렸듯이 한 나라의 정신문화는 언어의 마지노선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누구도 누구를 존경하지 않는다. 17세기 토머스 홉스가 말한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싸움'처럼 우리는 만인 대(對) 만인의 조롱사회에 들어섰다.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절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냥 묻혀 버린다. 오래전 시인 신경림은 우리에게 절규가 사라졌다고 했다. 조롱이 가장 인기있는 삶의 방식이 됐다.

    조롱의 목소리는 비아냥대기를 판매전략으로 내세운 비주류 언론의 전유물로만 알았다. 그들은 제도권의 정상에 오른 기득권 세력을 조롱함으로써 짧은 시간 안에 제 이름을 알렸다. 고발자 역할도 하고 반격도 피해가려면 비유적 요소를 많이 섞은 조롱이 효과적이었다. 10년 전쯤 그들은 사회 모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감시 역할을 한다는 뜻에서 조롱꾼들은 없어서는 안 될 간잽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내 어리석음이 하늘 끝에 닿았다. 그들은 비주류에 머물지 않았다. 조롱을 능수능란하게 써먹을 줄 아는 세력들은 이제 세상을 농단(壟斷)하고 있다.

    조롱은 원래 광대의 몫이었다. 왕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귀족과 종교인과 학자들을 비웃고 싶었다. 그러나 왕이 직접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일을 대신한 사람이 광대다. 광대는 왕이 지켜보는 연회장에서 귀족과 종교인과 학자를 비웃었다. 기원전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물려준 전통대로 상말을 쓰거나 성(性)과 돈과 정치를 말하는 것에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광대 역할을 떠맡고 있다. 조롱의 대상이었던 종교인·학자·판사가 마치 광대처럼 조롱을 일삼고 있다. 세상 일에는 일단 꼼수가 숨어 있다고 보고 딴죽을 건다. 조롱꾼은 변방의 비주류가 아니라 중앙의 대세(大勢)가 됐다. 기자뿐만 아니라 교수·소설가까지 합세하고 있다.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선은 희미해졌다.

    조롱을 생활방식으로 삼으면서 엄격한 찬반 논쟁은 퇴색했다. 사람들은 드잡이 싸움을 벌이려 두 패로 나뉘었다. 길거리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길거리에서 문제를 해결했다. 몽둥이와 주먹질과 방패와 투구와 물대포가 뒤섞인 어지러운 모습은 계속됐다.

    토론과 표결이 사라지면서 민주주의의 전당은 황폐화됐다. 오로지 조롱산업만 크게 번창했다. 지난 한 해 무상급식, 선별복지와 보편복지, 한·미 FTA, 4대강 보 같은 이슈를 놓고 선전전(宣傳戰)과 포퓰리즘이 만연했고, 유권자들은 흥행몰이에 취약했다. 말싸움은 바탕에 조롱을 깔았다. 비웃고, 비웃고, 또 비웃었다.

    오래전부터 프랑스의 가판대에는 '수요일에 나타나는 풍자'라고 부제(副題)를 붙인 주간신문 '카나르 앙셰네'(사슬에 묶인 오리)가 인기였다. 뉴스를 포착하여 철저하게 냉소적인 사회비평을 퍼부었다. 100여년 역사 속에 풍자와 조롱은 구별됐고 독자는 그것을 알아봤다. 노신(魯迅)은 "풍자의 생명은 진실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진실을 아랑곳하지 않는 현대의 조롱꾼은 혼자 있을 때 비겁하고 떼거리로 있을 때 위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