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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을 만나다

화이트보스 2012. 2. 12. 12:03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을 만나다

  • 취재=백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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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신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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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2.02.12 11:16 | 수정 : 2012.02.12 11:29

    37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다. 그중 대미를 장식한 4년 5개월은 그에게 너무나 고단한 시간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혹자들은 ‘통상정책의 종결자’라 부르고, 혹자들은 ‘옷만 갈아입은 이완용’이라고 부른다. 한·EU FTA, 한·미 FTA를 이끈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을 만났다.

    "지금 뭐하세요?"
    ‘뭐라고 불러야 할까?’ 호칭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기자에게 그는 “백수, 김 백수라고 불러요.”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순간 뚝섬유원지에 부는 차가운 바람이 그의 단정한 백발을 흩트려놓았다. 처음 보았다. 언제나 단정했던 은빛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것도, 슈트가 아닌 캐주얼한 복장을 입은 모습도.

    “여름이면 저기 저쪽에서 윈드서핑을 해요.” 그가 손끝으로 가리킨 곳은 한강변. 그곳에서 바람과 맞서며 윈드서핑에 몰입할 때가 제일 좋다고 했다. 그는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다. 패러글라이딩, 윈드서핑, 카이트 보드, 오프로드 바이크 등을 즐긴다. “지난 주말에는 오프로드 바이크를 탔어요. 눈길이라 미끄러웠지만 재미있었어요. 험로를 다니다 보면 가끔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도 해요. 어떤 험로는 상상불허죠. 아주 힘들어요.” 그는 골프처럼 활동량이 많지 않은 스포츠에는 흥미가 없다. 바람, 물 등 자연을 이용해 체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를 좋아한다. 자연과 맞설 때면 다른 생각들은 모두 잊어버린다.

    충렬사를 찾아가고 싶다

    “패러글라이딩을 하면 모든 생각들을 다 떨쳐버릴 수 있어요. 잘못하면 떨어져 죽으니까요.(웃음) 동력 없이 바람을 이용해 1000m까지 올라가게 되면 사람은 전혀 안 보이고 산, 동네, 강 이런 것만 보여요. 일종의 짜릿한 해방감을 느낀다고나 할까요? 가끔 난기류를 만나면 불안하기도 하지만요. 두어 번 죽을 뻔한 적도 있어요.”
    요즘에는 땅만 좀 있으면 소나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소나무를 보면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단다. 그래서 절에 다니며 법명을 받을 때도 ‘해송(海松)’이라고 했다.

    “백수생활을 시작했는데도 불안하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오히려 더 바빠요.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니거든요. 얼마 전에는 동네 주민들이 퇴임 환영식을 열어줬어요.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하더군요. 기분이 묘했습니다.” 퇴임 전까지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던 그는, 요 며칠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고 했다. 이임사에서 “당분간은 푹 쉬고 싶다”고 한 그는 얼마 전에는 가족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고, 며칠 뒤에는 아내와 꼭 가고 싶었던 통영으로 여행을 떠난다.

    “통영은 수학여행과 신혼여행으로 두 번 가봤어요. 아직도 그대로인지 꼭 가보고 싶어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충렬사도 갈 거예요. 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분을 가장 존경합니다.” 김 전 본부장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는 이유에 대해 “지금은 후세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만, 당시에는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어려운 난관을 슬기롭게 돌파한 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해요. 그분이 나라를 구해기 위해서 했던 노력, 혜안을 가지고 준비했던 것들을 보고 싶어요. 그곳에 가면 다른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대학 다닐 때부터 책을 구입하면 항상 첫 장에 ‘높은 산, 넓은 바다, 깊은 뿌리’라는 글귀를 적는다고 한다. ‘이상을 높게 갖고, 생각을 크게 하고, 의지를 깊게 하자’는 뜻이라고. 공무원 생활을 할 때도 항상 다짐하고 다짐했던 말이다.

    길고도 고단했던 4년 5개월

    김 전 본부장은 1974년 8회 외무고시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37년간 외교관의 길을 걸었지만, 선망의 대상인 대사직은 한 번도 맡지 않았다.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수석대표를 맡아 실무협상을 지휘했고,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8월 통상교섭본부장(장관급)에 임명돼 현 정부 장관 중 최장기간인 4년 5개월간 자리를 지키며 한·EU FTA, 한·미 FTA 등 굵직굵직한 협상을 이뤄냈다.

    그러나 그는 통상교섭본부장 재임기간 동안 수많은 시민단체와 야당의 공세를 받아야 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야당이 한·미 FTA 협정 이행을 위한 미국의 법 개정 여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며 김 전 본부장을 직무 유기로 고소하기도 했다. 또 얼마 전 한 케이블TV 버라이어티 쇼에서는 한·미 FTA 협정 발효를 위한 국무회의에 앞서서 “한·미 FTA를 반대하는 분들의 분이 좀 풀리고, 논란을 끝낼 수 있다면 나를 밟고 가도 좋다”고 밝힌 김 전 본부장의 발언에 대해, “많은 분들이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알고 싶어 한다”며 인신공격성 멘트를 하기도 했다. 김 전 본부장의 심경이 오죽했으랴, 그는 자신의 심경을 한 일간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지난주 한·미 FTA 토론회(2011년 10월 30일)를 마치고 고단한 몸으로 돌아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지난 몇 년을 돌아보았다. 수석대표로서 미국과 협상을 벌이고 세계로 뻗어가는 활기찬 대한민국을 꿈꿨던 시간은 잠시였다. 협상보다 더 오랜 시간 우리 내부의 이견을 설득하고 편견과 싸워야 했다. “옷만 갈아입은 이완용”, “미국의 총독”이라며 모욕하는 순간도 참아야 했다. 통상교섭본부장의 짐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수고 많다면서 차비를 받지 않던 택시 기사님, 한사코 밥값을 받지 않던 곱창집 아저씨, 멘토가 되어달라던 대학생들 그리고 이제 두 살인 손녀를 생각하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곤 했다.>

    “4년 5개월이라는 시간도 참 길었고, 제가 앉은 자리도 쉬운 자리가 아니었어요. 협상 상대국도 상대해야 하는데 국내에서는 잘했다는 이야기를 듣기 힘들고, 권한이 있거나 큰 예산을 가지고 있는 조직도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후배들도 생각해야죠. 좀 지쳤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래서 퇴임 의사를 밝혔어요.(한숨)”
    그는 사실만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고 토론할 수 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념이 서로 너무 달랐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뚜렷한 시각차를 느꼈다고. 독특한 이념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혹시 소통이 부족했거나 방법이 틀렸던 것은 아닐까? 넌지시 물어보았다. “현직에 있을 때 ‘어떻게 소통해야 하나’라는 고민을 많이 했고 노력도 해봤어요. 토론이나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고 신문에 기고도 했어요. 젊은 친구들과 소통하려고 트위터 인터뷰도 했고요. 그러다 어느 날, 합리를 넘어선 감정적인 형태의 반론을 접하고는 큰 좌절감을 느꼈어요.”

    그는 규모가 크든 작든 개방이 있을 때마다 국내에서는 사회적 논란이 크게 일었다고 했다. 담배나 바나나 같은 상품을 개방할 때도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고.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개방이 국민들에게 도움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자원이 풍족하지 않고 내수시장도 크지 않아서 남의 나라에서 원료를 가져와 부지런히 가공을 해서 팔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개방적 통상국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무역이란 상품을 사고파는 것입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거래가 이뤄져야 합니다. 다만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고수익의 부가가치가 만들어진 다음 그걸 똑같이 나눠가지느냐’죠. 대기업만 좋아지고 서민들은 점점 살기 어려워져 양극화가 심해지는 문제는 남아 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FTA는 경제논리를 기반으로 한 경쟁과 개방의 정책이며 분배문제까지는 해결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FTA로 키운 파이를 나누려면 그에 맞는 정책이 적절하게 조합되어야 한다. 그는 이 주장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분배에 도움이 안 된다고 FTA 자체를 나쁘게 몰아붙이는 논리는 틀렸다는 생각이다. “FTA를 안 하면 양극화가 해결됩니까? 다 같이 못살자는 건데, 그건 해법이 아니죠. 한때 우리나라가 아르헨티나만큼 살면 여한이 없겠다는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보다 땅도 좁고 인구도 적지만 잘사는 나라가 많아요. 우리는 이제 겨우 국민소득 2만 달러인데, 이 정도 살게 됐으니 이쯤에서 적당히 나눠먹고 살자는 건 후세에게 도리가 아니죠.”

    가장 큰 낙은 손녀 재롱과 아내와의 막걸리 타임

    김 전 본부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카페에서는 아이유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한류로 옮겨졌다. 2004년 일본 문화산업 전면 개방을 앞두고 국내에서는 일본 문화에 안방을 내주는 일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주장이 무색할 정도로 일본이 한류의 최대 소비국이 되었다. 오히려 일본에서 한류를 견제하고 있다. 그는 스크린쿼터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1964년에 도입된 스크린쿼터제는 다양한 변화를 겪어오다가 2006년 7월 1일부터 종전 146일에서 73일로 축소됐어요. 당시 영화 분야 종사자들의 반발이 엄청났죠. 그러나 최근 5년간 한국 영화 관객점유율은 40% 후반대를 유지하고 있고, 작년에는 재작년보다 무려 5.3%나 상승한 51.9%를 기록했어요. 개방은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경쟁은 곧 성장을 가속화합니다.”

    그러나 김 전 본부장의 생각과 달리 시민단체와 일부 사람들은 한·미 FTA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여전히 거두지 않고 있다. 그는 이 또한 세월이 지나면 모두가 이해하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그 일을 하면서 보람도 있었어요. 기업체에 근무하는 선배들이나 지인들이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얼마 전에는 사찰에 갔는데 지방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분들이 많이 오셨더라고요. 그중에서 화학 물감 안료 사업을 하는 어떤 분은 한·미 FTA가 체결된 뒤 주문이 엄청나게 들어온다면서 제게 고맙다고 하시더군요.”

    최근 그는 지방 상공회의소, 기업, 대학 등지로 강연을 하러 다닌다. 강연 약속을 한 곳만 10곳이 넘는다. 가는 곳마다 청중의 관심 분야가 달라 준비할 게 많다는 김 전 본부장. 요즘 그의 가장 큰 낙은 아내와 함께 저녁식사를 겸해서 막걸리를 마시는 일과 두 살 된 손녀딸의 재롱을 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