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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파괴하는 진보당의 '眞理 정치'

화이트보스 2012. 5. 11. 11:03

민주주의 파괴하는 진보당의 '眞理 정치'

  •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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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2.05.10 23:05

    부정선거 만천하에 드러났어도 당권파 '우리는 잘못한 것 없다'
    자신들을 '진리의 주체'로 여겨… 반대자 적대시, 내부 비판 금지
    투표의 공공성마저 단칼에 무시… 동·퇴보적인 '그들만의 확신'

    19대 총선 비례대표 경선에서의 부정과 불법이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통합진보당 당권파는 당당하다. 여론의 융단폭격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반격을 노리고 있을 정도다. 일각에서는 이를 비례대표로 당선된 실세(實勢) 이석기 당선인을 위한 시간 끌기와 물 타기로 본다. 당권파가 돈과 자리 욕심 때문에 버틴다는 냉소적 분석도 있다.

    이는 일리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통진당 당권파의 행동에 대한 입체적 설명으론 불충분하다. 민노당 시절부터 패권적 행태를 보여온 당권파가 이번 사태에서 유난히 '피해자' '순교자'를 자처하는 까닭을 정치적 꼼수로만 여기는 건 단견(短見)이다. 예컨대 당권파 기대주인 김재연 당선자는 당내 진상조사위원회가 "총체적 부실·부정선거였다"고 규정한 경선과정을 "정정당당하고 합법적이며 깨끗한 선거였다"며 오히려 되받아친다. 이정희 공동대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진상조사위원회가 중세적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넘쳐나는 부정선거의 증거들조차 단칼에 부인한다. 이어서 이 대표는 "지금의 여론재판을 정면돌파하는 게 제 양심의 최소한"이라며 절규하기까지 한다.

    이토록 비장한 어법과 결연한 주장이 정치공학적 계산의 소산일 수만은 없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통진당 당권파의 막가파식 행태는 '진리(眞理)의 정치'로 명명 가능한 뿌리 깊은 인식의 틀에서 나온다. 진리의 정치란 정치영역에 강력한 진리 주장을 투사하는 이념으로서, 학문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처럼 정치적 실천의 진리성도 판별 가능하다는 확신이다. 진리의 정치를 믿는 사람들은 그 진리를 알고 실행하는 쪽과 그렇지 못한 열등한 쪽을 칼같이 나눈다. 자기들 스스로를 정치적 진리의 주체로 확신하는 건 물론이다. 우월감과 소명의식으로 무장한 이들이 정치적 반대자를 적(敵)으로 여기면서 내부비판을 금기시하는 건 이 때문이다.

    진리의 정치는 마르크스주의의 흐름에서 가장 선명히 드러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대의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를 합리화하는 가짜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따라서 투표 절차의 공정성 같은 '부르주아적' 규칙들은 진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언제든지 무시될 수 있다. 혁명의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정직성과 합리성의 가치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취급된다. 진리정치의 주창자들은 현실투쟁에서 패배한다 해도 역사투쟁을 기약하기 마련이다. 수십 년간 복역한 좌파 사상범들이 전향을 거부하면서 종교적 순교자처럼 처절한 정치적 양심의 수호자로 남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동아시아 유교전통에서도 진리정치의 면면이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정치를 천명(天命)의 실현으로 볼 때 정치 영역의 갈등과 이견은 천명의 훼손, 즉 진리 자체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조선조 붕당정치의 권력투쟁이 예송(禮訟)으로 포장되어 장례의식(儀式) 등의 옳고 그름을 두고 치열하게 다툰 이유다. 당파싸움을 정치적 진리에 충실한 행동으로 정당화한 것이다.

    내(우리)가 진리의 편일 때 나와 우리에 대한 반대자와 비판가들은 허위의 편일 수밖에 없다. "엄청난 물리적 압박과 탄압에 굴하지 않겠다"는 이석기 당선인의 말처럼 이들은 자신들 같은 정치적 진리의 체현자(體現者)가 불의(不義)한 세력에 의해 핍박받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면 건전한 비판조차 음해가 된다. 이정희 대표가 스스로 전권을 부여한 진상조사위원회의 발표를 '무고(誣告)'라고 공격하는 건 정략(政略)의 산물이기에 앞서 이런 착란적(錯亂的) 멘털리티의 소산이다.

    통진당 당권파의 행보가 정치적 계산에서 나왔다면 해결은 차라리 쉽다. 그러나 그들의 확신이 시대착오적이고 반동적인 진리정치 이념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황은 훨씬 심각하다. 이정희 대표를 위시한 당권파가 종북적(從北的)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와 봉건적 유교이념을 뒤섞어 극단적 민족주의로 분칠한 북한의 주체사상이야말로 사상 최악의 진리정치 이념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그토록 똑똑한 이정희 대표가 자기성찰과 합리성의 완전한 결여를 보여주는 충격적 모순도 놀라운 일이 못 된다.

    극단화한 진리정치는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편집증적 진리정치에 집착하는 당권파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진정한 진보정치를 해치는 암종(癌腫)이 아닐 수 없다. 진보의 상징이었던 이정희 대표의 '소름끼치는' 변신과 추락은 폭주(暴走)하는 통진당 당권파가 민주주의의 적(敵)임과 동시에 한국 진보의 적이라는 사실을 웅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