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8.22 03:01 | 수정 : 2012.08.22 10:02
대선후보로서 해결할 문제
② 최태민씨 의혹
최씨는 어떤 사람 - 경찰→승려→중학교 교장, 사이비 교주로도 활동, 이름 7개에 결혼도 6차례
朴후보와 어떤 관계 - 육영수 여사 사망 계기로 인연 "박근혜 이름 팔아 이권 개입"
70년대말 中情 조사 받기도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를 검증할 때 빠지지 않고 제기되는 의혹은 1970년대 말 박근혜와 함께 대한구국봉사단을 운영했던 고(故) 최태민 목사(1912~1994) 문제다.
◇최태민은 누구?
중앙정보부는 1970년대 말 최씨를 조사했다. 중정의 수사자료로 알려진 문건에는 "박근혜의 후원으로 구국봉사단을 설립, 매사 박근혜 명의를 팔아 이권 개입 및 불투명한 거액의 금품을 징수했다" "롯데, 신라호텔 등을 무대로 매일같이 정·관·재·언론계 등 중진인사와 접촉, 초호화판으로 행세하면서 이권개입, 금품수수를 하고 엽색(獵色) 행각으로 물의를 야기했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 공사 수주, 장군 승진, 국회의원 공천 명목으로 돈을 받고 공금을 빼돌려 차명계좌로 세탁하는 등 총 44건 3억1755만여원의 비리 항목이 적시돼 있다. 별도로 12건의 여자관계도 있다.
최씨의 딸 최순실씨는 2007년 한나라당 검증 청문회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우리 집을 덮쳐 온 집안을 샅샅이 수색했으며, 심지어 장독의 고추장까지 파내 수색했다"며 "당시 중정 조사가 시작될 때 아버지는 위출혈과 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며칠 밤을 새우면서 아버지를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했다. 만일 아버지(최태민)가 그런 죄를 저질렀다면 감옥에 보냈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 최씨는 1979년 10·26사태 후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의 지시로 강원도 인제의 군부대로 보내졌다.
최씨는 일제강점기 전후 경찰공무원으로 활동하다 육군 헌병대 문관으로도 근무했고(1949년),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는가 하면(1954년) 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도 취임했다. 그 뒤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에서 사이비종교인 '영생교'를 만들고 교주로도 활동했다. 박근혜를 만난 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름을 7개 가졌으며 결혼도 6차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민은 누구?
중앙정보부는 1970년대 말 최씨를 조사했다. 중정의 수사자료로 알려진 문건에는 "박근혜의 후원으로 구국봉사단을 설립, 매사 박근혜 명의를 팔아 이권 개입 및 불투명한 거액의 금품을 징수했다" "롯데, 신라호텔 등을 무대로 매일같이 정·관·재·언론계 등 중진인사와 접촉, 초호화판으로 행세하면서 이권개입, 금품수수를 하고 엽색(獵色) 행각으로 물의를 야기했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 공사 수주, 장군 승진, 국회의원 공천 명목으로 돈을 받고 공금을 빼돌려 차명계좌로 세탁하는 등 총 44건 3억1755만여원의 비리 항목이 적시돼 있다. 별도로 12건의 여자관계도 있다.
최씨의 딸 최순실씨는 2007년 한나라당 검증 청문회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우리 집을 덮쳐 온 집안을 샅샅이 수색했으며, 심지어 장독의 고추장까지 파내 수색했다"며 "당시 중정 조사가 시작될 때 아버지는 위출혈과 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며칠 밤을 새우면서 아버지를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했다. 만일 아버지(최태민)가 그런 죄를 저질렀다면 감옥에 보냈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 최씨는 1979년 10·26사태 후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의 지시로 강원도 인제의 군부대로 보내졌다.
최씨는 일제강점기 전후 경찰공무원으로 활동하다 육군 헌병대 문관으로도 근무했고(1949년),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는가 하면(1954년) 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도 취임했다. 그 뒤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에서 사이비종교인 '영생교'를 만들고 교주로도 활동했다. 박근혜를 만난 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름을 7개 가졌으며 결혼도 6차례 한 것으로 알려졌다.
- 1977년 3월 16일 새마음 궐기대회에 참석한 박근혜 당시 퍼스트레이디 대리(가운데)가 최태민 당시 구국봉사단 총재(맨 오른쪽)의 안내로 걸스카우트 대원들을 돌아보며 격려하는 모습.
최씨를 수사한 당시 중앙정보부의 수사자료에 따르면, "최태민은 박근혜에게 3차에 걸쳐 꿈에 '육(영수) 여사가 나타나 근혜를 도와주라'는 현몽(現夢·죽은 사람이나 신령이 꿈에 나타남)이 있었다는 내용의 서신을 발송, 1975년 3월 6일 박근혜와 접견했다"고 돼 있다. 당시 최씨는 63세였다. 박 후보는 지난 2007년 검증 청문회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해에 수많은 위로 편지와 전화를 받았다. 그 내용이 상당히 마음에 와 닿고, 만나서 얘기 듣고 싶을 때 만났다. 최씨는 그렇게 해서 만난 몇 분 중 한 분"이라고 말했다.
1970년대 중·후반 신문을 보면, 박근혜와 최씨가 함께 행사에 참여한 사진과 기사들을 볼 수 있다. 최태민은 1975년 5월 임진강에서 구국기도회를 개최했고, 이 자리에 참석한 박 후보가 대한구국선교단의 명예총재로 추대됐다. 선교단은 이후 대한구국봉사단(1976년), 새마음봉사단(1978년)으로 이름을 바꿨고, 박근혜와 최씨는 각각 명예총재와 총재로 활동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을 지냈던 선우련씨의 1977년 9월 20일자 비망록에 따르면, "9월 12일 밤 대통령은 근혜양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및 백광현 정보부7국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구국봉사단 최태민의 부정부패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친국(親鞫)을 했다. 대통령은 근혜양과 관련해 물의를 일으킨 최태민 구국봉사단 총재를 거세(去勢)하고, 최씨를 청와대 근처에는 얼씬 못하게 하고, 구국봉사단 관련 단체는 모두 해체하라는 세 가지 지시를 했다"고 돼 있다.
최씨는 그러나 박근혜가 1982년부터 1990년까지 이사장을 맡은 육영재단의 고문을 지냈다. 1990년에 근령·지만씨가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최태민 목사로부터 언니(누나)를 구출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최씨는 박근혜의 강남구 삼성동 자택에서 500m 떨어진 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 박 후보는 지난 2007년 언론 인터뷰에서 "알지 못한다"고 했다. 최씨의 딸 순실씨는 2007년 검증 청문회 때 "그렇다는 얘기를 듣고 알아 보니 수㎞ 떨어져 있었다. 박 후보는 저희 집 위치를 알지 못하며, 서로 내왕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박근혜는 2007년 검증 청문회에서 최씨에 대해 "누군가를 만나 일을 할 때 결혼 몇 번 했는지, 이름 몇 번 바꿨는지 알 수 없다"며 "최 목사가 내가 어려운 시절에 도왔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근혜는 또 당시 최씨와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루머에 대해서 "이런 네거티브는 천벌을 받을 짓 아닌가. 애를 데리고 오면 DNA 검사라도 하겠다"고 말했다.
키워드 |
- 2대에 걸쳐 영향력 행사? 최씨 사위도 미스터리 김시현 기자
- 단칸방 살았다는데… 최씨 일가의 수백억 재산은 선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