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4.07 22:46
정보 과잉, 너무 많이 기억하느라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딜레마…
온전한 기억을 위해선 '망각'도 중요… 인터넷만 열면 정보 넘쳐나는 세상
'모으기'보다 '버리기'의 정보 처리 유용, 조작·최면 아닌 선택·성찰의 기억을…
김미현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과 사물을 변화시키는 중이다. 있던 것들이 없어지고, 없던 것들이 생겨난다. 새로 생겨난 것들도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라지는 것은 흔적을 남긴다. 흔적이 흔적인 이유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흔적을 통해서 과거는 현재로 흘러들어 온다. 과거로 인해 현재는 풍요로워지기도 하고 황폐해지기도 한다. 새로운 미래도 과거를 통해 형성된다. 미래에 대한 답은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국문학자 김열규의 신간 '이젠 없는 것들'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것들을 통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문학적 배경과 연결되는 대표적 공간들을 예로 들어보자. 남자 어른들이 기거하던 사랑(舍廊)이 없어져서 어머니를 찾는 손님의 발길도 끊어진 듯하다(주요섭 '사랑 손님과 어머니'). 나루와 나룻배가 없어져서 행인(行人)인 '당신'은 '나'를 이제는 짓밟기조차 못 한다(한용운 '나룻배와 행인'). 징검다리가 없어져서 더 이상 소년과 소녀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만날 수도 없다(황순원 '소나기').
이뿐만이 아니다. 음악과 관련된 기기(機器)도 부침이 있다.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남녀 주인공이 노래 '기억의 습작'을 같이 듣던 CD 플레이어가 복고 상품으로 다시 유행했다는데, 이제는 CD가 아니라 SD카드 음반이나 USB 음반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불편한 줄도 모르고 LP나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었던 때가 언제인가 싶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장기하와 얼굴들, 신촌블루스 같은 가수들은 LP로 신곡을 내기도 하나 보다. 사실 김광석이나 들국화 노래는 LP로 들어야 제맛이 난다.
물론 과거에 대한 기억이 무조건 소중한 것은 아니다. 자아 정체성을 찾아주는 '착한 기억'의 대표적 예에 해당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는 대비되는 작품이 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이다. 푸네스는 낙마 사고 이후 완벽에 가까운 기억력을 갖게 되지만, 이런 비상한 능력으로 오히려 현재 시간을 과거 복원에 허비하게 된다. 현재가 과거에 속박되는 형국이다. 온전한 기억을 위해서는 망각도 중요하다는 아이러니가 여기서 발생한다.
이런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인터넷 정보와 연결해 설명할 수도 있다. 푸네스의 엄청난 기억처럼 인터넷 정보가 넘쳐날 때는 나무 조각들을 많이 끌어모아다가 만드는 배인 '카약(kayak)'보다는 통나무 속을 파고 버리면서 만드는 배인 '카누(canoe)'와 같은 정보 처리 방식이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많이 가지는 것보다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은 기억이나 정보나 마찬가지다. 유엔에 의하면 2030년에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100세가 될 것이고 장수하는 사람은 130세까지도 살 수 있을 거라니, 그만큼 더 늘어나는 기억을 취사선택할 필요성도 커질 듯하다. 기억도 느리게 늙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주인공이 울부짖었던 "나, 돌아갈래"의 의미는 이창동 감독이 직접 밝혔듯이 단순한 과거 지향이나 복고 지향이 아니다. 순수 혹은 원점으로 회귀함을 뜻하는 것이다. '잊지 않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의지'에 대한 강조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기억함과 동시에 잊어야 할 것을 망각하는 능력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소중한 것을 '잊지 않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는' 차원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조작이나 최면이 아닌 선택과 성찰이 작동하는 기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혹시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느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딜레마에 빠진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자. 기억해야 할 초심(初心)은 망각한 채 망각해야 할 상처만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도 해보자. 기억은 시간처럼 주관적이지만 시계처럼 공평하다. 그러니 과거에 매몰되자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강도와 온도를 적절히 조절함으로써 과거를 잘 활용해 보자는 것이다. 망각할 것은 망각하고 가치 있는 것은 기억한다면, 미래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난쟁이의 역할을 과거가 해줄 수 있다. 북한 도발 방지, 부동산 대책, 인사 정책의 합리화, 4대 폭력 척결, 국민과 소통하는 일 등등의 현안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문제점이 아닐 때는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