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7.31 03:04
-
- 김기천 논설위원
운조루의 굴뚝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아주 낮게 만들어져 있다. 굶는 집이 많았던 시절 밥 짓는 연기가 높이 솟아올라 가난한 이웃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구례 지역에선 동학농민전쟁과 빨치산의 발호, 6·25전쟁을 거치며 많은 부자가 피해를 봤다. 그 와중에 운조루만은 아무 탈 없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나눔과 배려의 정신 덕분이라고 한다.
요즘 우리 사회의 부유층과 지도층에선 이렇게 남에게 베풀고 스스로 몸을 낮추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눈치·염치 없이 자기 이익에만 매달리고 재산을 빼돌리다 국민의 분노를 사기 일쑤다.
최근 전두환 전(前) 대통령 일가의 재산 문제가 연일 화제에 오르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비자금 조성과 관련해 2205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으나 아직까지 1672억원을 내지 않고 있다. 예금통장에 29만원밖에 남아 있지 않다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알거지나 다름없는 그의 3남1녀 자녀는 최소한 수백억원대 재산가라고 한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아들이 베트남에서 600억원대 고급 골프장을 인수한 것도 논란거리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부도와 관련해 17조9253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지금까지 검찰이 추징한 돈은 887억원에 지나지 않는다. 추징금 액수가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김 전 회장은 국가에 17조원이 넘는 빚을 지고 있다. 본인은 빈털터리이지만 가족들은 여전히 재력(財力)을 과시하고 있으니 재산을 미리 빼돌린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SK·한화·CJ·태광산업 등 재벌 그룹 총수들의 수백억~수천억원대 횡령·배임·탈세 사건도 끊이지 않고 있다. 재벌가 형제들이 유산(遺産) 다툼으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그때마다 잘하고 있는 기업들까지 싸잡아 욕을 먹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흔들린다.
"자본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은 자본가들"이라는 말이 있다. 가진 자들의 무분별한 탐욕이 자본주의 체제를 벼랑 끝으로 내몰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소유욕과 탐욕은 자본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動力)이면서 동시에 위기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문제가 터질 때마다 대안(代案)을 찾아 변신하고 진화하는 자정(自淨) 능력도 갖고 있다. 미국에서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같은 1·2위 갑부들이 부자 증세(增稅)를 주장하고, 재산의 사회 환원에 앞장서고 있는 것은 그런 노력의 하나다.
한국 경제의 시급한 과제 중 하나는 이런 자정 장치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혜택받은 계층이 체제 유지를 위한 부담을 져야 한다. 자기 이익을 내놓는 게 결국은 자기 이익을 지키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득과 부(富)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 우리 경제의 안정을 위협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