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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말수

화이트보스 2013. 8. 23. 11:47

대통령의 말수

  • 주용중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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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3.08.23 03:06

    대통령 말 많으면 괜한 트집 잡히고 시누이 '잔소리' 오해도 받게 돼
    참모들 딴말 못하고 책임의식 흐려져… 이제 총리·장관에게 메시지 분담시켜야

    
	주용중 정치부장
    주용중 정치부장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하는 수석비서관회의와 국무회의가 있는 날이면 정치부 데스크로서 고민스러울 때가 잦다. 발언의 주제도 다양하고 길어서 뭘 써야 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 20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대통령은 공개용 모두(冒頭) 발언에서만 원고지 21매 분량으로 말했다. 어떤 신문은 비정상 관행 바로잡기를, 어떤 신문은 증세 없는 복지 강조를, 어떤 신문은 내년 예산안 편성 원칙을, 또 어떤 신문은 전·월세 대책 마련 지시를 기사화했다.

    기사 쓸 게 많다는 것은 물론 기자 입장에선 다행이다. 이명박 청와대를 취재했던 필자에게 대통령이 공식회의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아내는 것은 정말 힘겨운 일이었다.

    박 대통령은 올해 벽두 '조용한 인수위'를 내세우면서 말을 삼가다가, 1월 26~27일 이틀 동안 원고지 130장 분량을 쏟아냈다. 경제1분과와 2분과 비공개 토론회에서 있었던 대통령의 지시사항이 전문 공개됐다. 당시 참모들은 대통령의 말의 무게가 가벼워질 수 있다는 점 등을 걱정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행정 정보 공개가 요체인 정부 3.0 공약과 관련해, 본인의 메시지부터 투명하게 공개하려는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이런 원칙을 지키고 있다. 더구나 박 대통령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국민 뇌리에 각인될 정도로 거듭해서 말하는 스타일이다.

    과거 어느 대통령은 공식회의에서 참모들이 써준 걸 그대로 읽다시피 했다. 박 대통령은 참모들이 보고한 '말씀 자료'를 토대로 주말에 홀로 원고를 다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발언록을 읽다 보면 대통령의 체화된 생각이라는 느낌을 왕왕 받는다.

    대통령이 열심히 일하니까 많이 알고, 그래서 많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대통령의 말수가 과도하게 공개될 때의 부작용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박 대통령은 책임장관·책임총리제를 약속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시시콜콜한 것까지 지시하는 걸 보고 국민은 뭐든지 대통령만 쳐다보게 된다. 총리와 장관은 점차 잘아지고 종국에는 사사건건 대통령에게 책임이 돌아가게 될 것이다.

    말이 많아지면 아무래도 트집을 잡히게 된다. 국가기록원이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을 찾지 못한 데 대해 박 대통령은 지난 6일 "중요한 사초(史草)가 증발한 전대미문의 일은 국기를 흔들고 역사를 지우는 일로,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야당은 "검찰 수사에 지침을 줬다"고 공격했다.

    박 대통령은 말을 무겁게 여겨온 정치인이지만 대통령의 말은 이해관계에 따라 국민도 제각각 해석하고 다른 나라들도 제각각 해석한다. 아무리 돌다리를 두드려 말을 해도 여과 없이 전달되면 본의와 달리 구설에 오르는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대통령이 모두 발언에서 각종 현안에 대해 미리 답을 내놓았는데 이후 장관이나 수석들이 대통령과 얼마나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을지, 얼마나 생산적인 토론이 될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대통령은 난상토론을 유도한 뒤 그 종결자가 돼야지, 초장부터 다른 사람들의 말문을 닫게 해서는 안 된다. 권위주의로 비치기 십상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5월 언론사 정치부장단과 오찬에서 "좀 말이 많아지지 않았나 그런 얘기를 하셨는데 지금은 얘기를 좀 많이 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다. 각 부처가 업무보고 할 때 공무원 사회가 국정 철학을 공유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업무보고도 끝나고 정부 시스템도 어느 정도 갖춰졌다. 지금부터는 대통령의 메시지를 총리나 장관들의 메시지로 분담시켜야 한다. 똑같은 얘기가 반복되고, 도덕 교과서 같은 말들이 늘어나다 보면 대통령의 말이 시누이의 잔소리처럼 들릴 때가 올 수 있다. 벌써 그런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