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보물창고' 진도 오류리 해역
거북선 묻혀 있을까
다도해의 바닷물이 서해 바다로 흘러갔다가 되돌아올 때면 물이 빙글빙글 돌고 솟구친다. 강물이 세차게 흐르듯 물살은 14노트의 속력으로 달리며 마구 뒹구는 듯한 소리를 낸다. 폭이 295m에 불과한 해협은 마치 사람의 목에 있는 울대 같은 곳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곳을 ‘울두목’이라고 불렀다. 강화도의 좁은 해협인 ‘손돌목’을 본뜬 ‘울돌목’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지난 1월 23일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연구소(소장 소재구)가 작년 4월부터 11월까지 이뤄진 수중발굴에서 삼국시대 초기의 토기를 비롯하여 고려시대 청자류, 용무늬 청동거울, 임진왜란 당시의 포탄 등 500여점의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한 진도 오류리(五柳里) 인근 앞바다 얘기다. 문화재청이 ‘수중문화재의 보고’로 발표한 곳은 정확히 말해 진도와 해남을 잇는 진도연륙대교가 놓여 있는 울돌목에서 동쪽으로 5㎞가량 떨어져 있는 물목이다.
지난 1월 23일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연구소(소장 소재구)가 작년 4월부터 11월까지 이뤄진 수중발굴에서 삼국시대 초기의 토기를 비롯하여 고려시대 청자류, 용무늬 청동거울, 임진왜란 당시의 포탄 등 500여점의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한 진도 오류리(五柳里) 인근 앞바다 얘기다. 문화재청이 ‘수중문화재의 보고’로 발표한 곳은 정확히 말해 진도와 해남을 잇는 진도연륙대교가 놓여 있는 울돌목에서 동쪽으로 5㎞가량 떨어져 있는 물목이다.
- 진도와 해남을 잇는 진도대교 아래서 열린 명량대첩 재현 행사. 김영근 기자
현재 녹진나루가 있던 진도 녹진리 망금산(111.5m)과 건너편 해남 우수영 자리에는 찬란했던 과거사와는 무관한 송전철탑이 세워져 있다. 망금산 중턱에는 둘레 460m의 토성이 있는데 이 토성 안에서도 군용으로 쓰였음 직한 막사터와 백제시대 이후 여러 가지 토기 조각들이 나왔다. 전라남도는 이 성을 ‘망금산 관방성’이라 이름하여 2002년 7월 도기념물 204호로 지정했다.
이곳 주민들은 이 성을 진도 여자들이 정유재란 때 강강술래를 했다는 ‘강강술래터’라고 주장한다. 토성 바로 밑에 붉은 빛깔의 작은 돌섬이 있는데, 정유재란 때 이 물목에서 죽은 일본 군사들의 피로 물들여져 붉은 빛을 띤다 하여 ‘피섬’이라고도 부른다. 강강술래터 건너 해남 우수영의 송전철탑 자리에도 물목을 지나가는 적을 공격했던 관방성이 있다. 피섬 곁에는 조력발전 시험시설이 10년째 시험만 계속해 오고 있는데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
망금산 정상에는 우수영에 신호를 보내던 봉화대가 있었으나 진도군은 지난해 이곳에 배를 닮은 전망대를 세워 자랑삼고 있다. 망금산 전망대에 오르면 동남쪽으로 임진왜란 당시 왜군 선단이 주둔했던 어란포가 멀리 보이고 오류해역과 용장산이 보인다. 서쪽으로는 이순신 장군이 마름을 입혀 곡식창고로 위장했다는 독암산이 우뚝 서 있고 멀리 진도 서해 쪽으로는 가사군도의 손가락섬, 발가락섬, 가사섬, 하의섬, 장산섬 등이 늘어서 있다. 해남 우수영도 눈 아래 보이고 멀리 목포 유달산까지 눈에 들어온다. 그야말로 장관이 펼쳐진다.
녹진나루에서 벽파나루까지의 해안선은 우리나라 어디서도 보기 힘든 아름답고 색다른 풍광을 자랑한다. 11㎞의 바다 길목 가운데에 굴섬, 녹섬, 넙섬, 솔섬 등이 박혀 있어 절경이다. 이 섬들은 이곳을 지나는 물길을 방해해 진도 쪽 굴곡이 심한 연안에 갯벌층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연안개답이 많이 이뤄져 왔다. 만금 갯벌은 1964년(2㏊ 규모), 신동해안은 1966년 19㏊ 규모로 개답되었고, 오류리 곁 둔전해역(263㏊)은 1959년, 오류동네 앞 갯벌은 14㏊가 농토로 변했다. 그래도 아직은 갯벌해역이 넓어 환경부는 2002년 12월 신동해안 갯벌 1.44㎢를 갯벌습지보호지구로 지정했다.
이 일대에 대한 문화재청의 본격적인 수중발굴이 시작된 것은 2012년 여름이다. 울돌목에서 수난을 당한 침몰선이 많을 것으로 본 해중유물전문 절도단이 오류리 앞바다에서 12점의 청자기를 건져내 팔려다가 덜미가 잡힌 것이 계기였다. 2012년과 작년 두 차례 발굴했으나 전문가들은 이 일대 갯벌 속에 묻힌 유물이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앞으로 5년 이상 발굴을 계속할 것이라는 게 문화재청의 입장이기도 하다.
- 진도 오류리 해역 부근 지도.
빠른 물길 때문에 시체는 멀리 떠밀렸으나 울돌목에서 재난을 당한 배들은 울돌목과 벽파진 사이 해역에 침몰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해역이 ‘수중문화재의 보고’로 불리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의 유물 때문만은 아니다. 물길이 워낙 거세 그 이전부터도 이곳을 지나다가 수난을 당한 피해 선박들이 많았다.
특히 벽파진은 진도에서 육지로 통하는 관문이었을 뿐 아니라 고대 무역 중개항의 흔적이 있는 역사적 포구이다. 고려시대 몽골에 저항했던 삼별초가 제주도로 가기 전 왕을 모시고 왕국을 세웠던 곳이기도 하다. 2009년 조선일보는 3월 14일자 토요섹션난에 유석재 기자의 글로 ‘사라진 삼별초, 오키나와 건너가 류큐왕국 세웠나?’라는 제목의 보도를 하면서 벽파진을 에워싼 용장산 성터에서 나온 기와가 오키나와에서 발굴되고 있는 기와와 같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제주도에서 토벌된 삼별초 유민들이 오키나와로 건너갔다는 설을 고려 기와가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국가사적 제126호인 용장산성의 길이는 12.85㎞로, 문화재청 수중발굴이 시행되고 있는 오류리도 이 성 안에 있다.
실제 오류리 벽파진은 용장성에 있던 삼별초 군사와 건너편 해남 옥동의 삼지원에 주둔하고 있던 여몽연합군과의 회담장소로 역사기록에 나온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거두던 때도 벽파진에 진을 치고 3일간 있다가 우수영에 숨어들어 이 물목의 물살을 이용했기 때문에 벽파진에 전첩비가 서 있다. 이 포구는 과거 목포∼제주 여객선의 기항지이기도 했고, 화물선들이 울돌목 세찬 물때를 피하기 위해 정박했던 포구 역할도 했다. 고려 말기 제주도에서 일어난 몽골난을 토평하기 위해 제주로 가던 최영 장군도 이 포구에서 쉬어 갔다는 구전이 전해온다.
1993년 벽파항 염전수로에서 길이 16.85m, 폭 2.34m의 통나무배가 발굴됐다. 목포해양연구소가 발굴한 이 배는 화학처리돼 현재 목포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관에 전시돼 있다. 이 배는 과거 벽파항이 얼마나 국제무역으로 번성하던 장소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당시발굴된 배는 중국 남송에서 나던 마미송으로 만든 배로 여기서 7가지 중국 화폐가 나왔다.
이 배에서 나온 중국 돈은 송나라 태종∼의종 때 유통됐다. 때문에 이 배는 1117년 무렵 벽파항에 왔을 것으로 추정됐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배에 실려 있던 돈 가운데 하나인 정화(政和)통보가 용장산성 정상에 있던 성황당 제사터에서 나온 옛 화폐 다섯 종류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오류리 해역에서 수습한 장구형 도기 몸통 역시 2006년 목포대학교 박물관 발굴단의 조사 때 용장산성 제사터에서도 나온 유물이다. 이러한 바닷속 유물들이 땅 위 용장산성에서도 발굴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작년 오류리 해역 2차 수중발굴 조사에서 건져 올린 유물들. 이덕훈 기자
이같은 중국의 풍습은 오래전부터 시작된 흔적이 있는데, 부안 수성당 제사터나 완도 청해진 제사터에서 토제 말이나 철제 말이 나타나는 것도 이같은 풍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용장산성 제사터에서도 중국 돈과 함께 철제 말 7개, 토제 말 2개가 출토되었다. 이 제사터에서는 오류리 수중발굴에서 나온 청동제 동경과 수저는 물론 마상배자기 파편도 나왔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명량해로의 수중유물들은 임진왜란 관련 유물에 한정되지 않고 이 지역 사람들이 항해 생활을 시작한 먼 옛날부터 근대에 이르는 유물을 망라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명량대첩 때 일본 수군이 출발한 해남 어란포에서 벽파진에 이르는 해역의 중간 물목에 해남군 화산면 관동포가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제주 사람들이 육지로 건너오던 포구로 벽파진 동남쪽에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곳이 남송(南宋) 무역의 기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남쪽에 위치한 물목인, 현산면 두모포와 백방포에도 남송 무역에 대한 구전이 많이 전해온다. 백포리에는 남송 무역을 떠난 남편들이 돌아오지 않자 아내가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망부산이 있다. 미황사가 자리 잡은 백포리 달마산은 남송상인들이 달마대사가 지낼 만한 산이라 여겨 달마산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장보고가 완도 청해진에서 무역을 했을 때도, 백포리나 두모포 항구가 남송 무역 기지로 쓰일 때도 진도 벽파항을 거치지 않으면 중국을 갈 수 없었다. 들물과 썰물의 막참을 피하자면 벽파항에서 대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만큼 벽파항은 요충지였다.
이처럼 많은 배들이 정박하는 포구라 고려 회종 3년인 1207년에는 벽파항 포구 언덕에 벽파정이라는 정각을 짓기도 했다. 손님을 접대하는 집도 두었고 여행객들이 항해의 안전을 빌던 당집도 있었다.
벽파항은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가기 위한 큰나루로 이용되면서 나루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던 진부리(津夫里)란 동네도 따로 있었다. 이 동네가 현재 수중발굴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오류리의 옛 이름이다. 서예로 유명한 진도 출신 소전 손재형씨의 할아버지인 손병익씨가 이곳 별장으로 근무할 때 진도에 유배되어온 구한말 개화당 인사들과 친분 있게 지내며 인심을 얻었다는 일화도 있다. 유배에서 풀려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손병익의 손자인 소전이 서울에 진출하게 됐다는 것이다.
벽파항은 신라 말기 최치원이 중국 유학을 가면서 묵은 곳이라는 구전도 전해온다. 많은 명사와 유배자들이 거쳤던 포구답게 제주출신 고조기(高兆基·?∼1157)가 지었다는 벽파정 기문을 비롯한 40여편의 기문이 진도 읍지에 실려 있다.
진도의 관문이자 수중문화재의 보고인 벽파나루는 1983년 녹진∼우수영에 진도대교가 개통되면서 쓸모없는 옛터로 버려지다시피 했다. 지역 전문가들이 유적 보전 사업이 필요하다고 수없이 건의했지만 상당수 유적지들이 복원되지 않고 있다. 벽파진에서 성황산에 이르는 해역은 조선시대에 둑을 막아 임성포 염전을 운영했기 때문에 과거에는 소금장수들 배도 많이 드나들었다. 불과 10여년 전까지만해도 제주∼목포 여객선들이 이 물목을 거쳐 벽파진에 기착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는 여객선들이 고속화되면서 진도 남쪽 장죽도 해로를 통과하는 것으로 항로가 변경돼 이 일대는 더더욱 한산한 포구로 버려져 있다.
앞서 소개한 2009년 3월 조선일보 보도 내용대로 이 일대에서 오키나와에서 발굴된 것과 똑같은 고려 기와들이 다수 발굴됐다. 때문에 오히려 일본 학자들이 이 일대에 대한 관심이 높고 방문하는 일도 잦다. 1907년 오키나와 우화소에죠에서 수습한 ‘계유년 고려와장조’라는 기문이 있는 기와의 경우 1273년 토벌된 제주의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건너간 데서 유래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는데, 진도 용장성에서 나온 계묘 명문기와는 연화문 하나가 더 많은 것만 빼고는 이 오키나와 기와와 닮은꼴이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오키나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여러 차례 용장산성을 다녀갔다. 2010년 11월 진도군 주최 목포대학교 박물관 주관의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오키나와대학 이게다(池田榮史) 교수는 오키나와에서 나오고 있는 고려 계열 기와는 용장산성의 삼별초와 관련이 깊다는 데 공감을 표했다. 이 학술대회에 참석했던 고구시관대학 도다(戶田有二) 교수는 삼별초 관련 유적과 항로는 유네스코 등재 가치가 있는 동북아시아 역사유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외국학자들까지도 그 중요성을 인정하는 벽파항 일대 유적과 용장산성은 국내학자들의 관심은 끌지 못했고 당국의 보호도 소홀하다. 삼별초가 10개월간 왕을 모시고 몽골에 대항했던 진도 삼별초왕국은 버려져 있다시피한 반면 왕이 죽은 후 도망쳐 지내던 제주 삼별초 유적지는 40여년 전 이미 성역화를 끝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용장성안 행궁터 오른쪽에는 높이 1.95m 크기의 석물좌상이 폐허 속에 서 있던 것을 1960년대 보호각을 짓고 용장사라 이름하여 비구니들이 돌보고 있다. 도(道)유형문화재 제17호이다. 성황산에 이르는 산기슭에는 야생녹차가 숲속에 버려져 있다.
용장성 안에는 삼별초가 왕으로 옹립한 승화후 온의 묘도 있다. 온왕은 여몽연합군의 기습을 받아 금갑진 쪽으로 도망가다 죽자 여몽연합군에 소속돼 있던 고려 사람들이 묻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도 남쪽 남도석성을 지키던 배중손 장군은 임회면 굴포에서 전사했다는 구전에 따라 이곳에 사당과 동상까지 세워졌다. 왕으로 추대되었던 승화후왕 온의 묘는 장군들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현재 용장산성의 중요 역사적 지점에 대해서는 발굴 작업이 끝나가고 있는데, 용장산성의 행궁터는 개성 왕궁과 같이 아홉 계단을 썼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음력 9월 16일이면 울돌목에서는 명량대첩제가 열리지만, 명량전쟁 때 긴하게 쓰였던 망금산 관방성 역시 아직 복원은커녕 토지 매입도 못하고 있다.
진도 사람들은 오류리 수중유물이 재조명을 받는 것을 계기로 벽파항 역사성이 재조명되고 이와 관련된 여러 유적들에도 정부가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바라고 있다. 현재 진도대교와 오류리 수중발굴지 사이 해역에는 발굴 작업을 위해 전복양식장 4곳, 다시마양식장 6곳이 면허 처분돼 있지만 이곳 주민들 사이에서는 모처럼 세상의 이목을 받게 된 발굴사업에 협력하는 것이 도리라는 여론이 높다.
오류리 수중 유물들은 갯벌층에서 20㎝ 이상 아래에 파묻혀 있는 것들이 많다. 울돌목 거센 물길을 타고 서해 바다에서 흘러온 흙탕물이 녹섬을 만나 기세가 꺾인 뒤 넓은 해안에 퇴적해 왔기 때문에 갯벌을 파내려 갈수록 고대 유물이 더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진도 사람들은 오류리 해역에서 일본군선이나 거북선 잔해라도 발굴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현지에 임진왜란 관련 전시관이나 박물관 유치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희망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