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경국전>, 정도전 지음, 한영우 옮김, 올재클래식스(2012)
KBS에서 주말에 방송하는 사극 <정도전>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정통사극인데다가, 한때 나의 로망이었던 정도전을 다룬 드라마여서 첫 회부터 본방 사수하고 있다 (내가 첫 회부터 드라마를 본방 사수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다).
KBS에서 주말에 방송하는 사극 <정도전>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정통사극인데다가, 한때 나의 로망이었던 정도전을 다룬 드라마여서 첫 회부터 본방 사수하고 있다 (내가 첫 회부터 드라마를 본방 사수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다).
‘정도전’을 다룬 드라마여서 보기 시작했는데, 요즘은 ‘정도전’은 보이지 않고 권신 ‘이인임’만 보이고 있다. 전에 드라마 <선덕여왕>을 할 때에는 “<선덕여왕>이라고 쓰고 <여걸 미실>이라고 읽는다”는 말이 돌았었다. <정도전>은 “<정도전>이라고 쓰고 <간웅 이인임>이라고 읽는다”라고 해야 할 판이다. 지난 주 일요일 이인임 역을 맡은 배우 박영규씨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좋아했다.
<정도전>을 보면서 고려말의 역사와 정도전의 삶과 사상을 반추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도전의 전기로는 조유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었고, 한동안은 정도전 관련 논문들도 많이 찾아서 읽었다. 근래 드라마의 인기를 타고 정도전을 다룬 전기와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런 데 눈길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꺼내든 책이 재작년에 올재클래식스에서 나온 <조선경국전>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쉽게 말해서 조선의 헌법 초안(草案)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이 자신이 생각하는 나라의 모습과 제도를 이 안에 담았다. 정도전을 얘기할 때는 반드시 등장하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다.
솔직히 <조선경국전>을 처음 몇 장 읽으면서 느낀 감정은 ‘실망감’이었다. ‘정도전의 정치철학과 경륜을 담은 명저’라고 알고 있었는데, 무미건조했다. 제도에 대한 설명은 중국 주나라 이래 역대 왕조의 제도들과 고려의 제도, 그리고 개국 초 아직 정비가 끝나지 않은 조선의 제도를 풀이하는 데 그친 것 같았다. 간혹 드러나는 민본주의 정치철학도 <맹자> 등 유가(儒家)의 사상을 반복하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법률의 초안이라는 것이 재미 있어봐야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그래도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재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도전의 정치철학, 고려말 권문세가의 횡포와 민생 파탄, 그리고 오늘날에도 유효한 국가운영의 원리 등이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경국전>은 쉽게 말해서 조선의 헌법 초안(草案)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이 자신이 생각하는 나라의 모습과 제도를 이 안에 담았다. 정도전을 얘기할 때는 반드시 등장하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다.
솔직히 <조선경국전>을 처음 몇 장 읽으면서 느낀 감정은 ‘실망감’이었다. ‘정도전의 정치철학과 경륜을 담은 명저’라고 알고 있었는데, 무미건조했다. 제도에 대한 설명은 중국 주나라 이래 역대 왕조의 제도들과 고려의 제도, 그리고 개국 초 아직 정비가 끝나지 않은 조선의 제도를 풀이하는 데 그친 것 같았다. 간혹 드러나는 민본주의 정치철학도 <맹자> 등 유가(儒家)의 사상을 반복하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법률의 초안이라는 것이 재미 있어봐야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그래도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재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도전의 정치철학, 고려말 권문세가의 횡포와 민생 파탄, 그리고 오늘날에도 유효한 국가운영의 원리 등이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총재(冢宰. 재상)가 훌륭한 사람이 등용되면 육전(六典)이 잘 거행되고 모든 직책이 잘 수행된다. 그러므로 인주(人主)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과 정사를 의논하는 것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 대목에서는 후일 태종 이방원과 갈등을 빚다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재상중심체제에 대한 정도전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토지제도가 붕괴되면서 호강자(豪强者)가 남의 토지를 겸병하여 부자는 밭고랑이 서로 줄을 잇댈 만큼 토지가 많아지고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갖지 못하게 되어 부자의 땅을 차경(借耕)하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서 그 이득을 차지하지 못하니 백성은 더욱 곤궁해지고 나라는 더욱 가난해졌다” “토지제도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면서 세력가들은 서로 토지를 빼앗아서, 한 사람이 경작하는 토지의 주인이 혹은 7,8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상하가 서로 이(利)를 다투고, 일어나 힘을 다투면서 서로 빼앗으니 화란이 이에 따라 일어나게 되고, 마침내는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라고 한 대목은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많이 그려진, 고려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여기서 ‘양극화’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경제민주화’의 논리를 찾을 지도 모르겠다.
“임금이나 재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관리가 되려는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여, 저 사람에게서 벼슬을 빼앗아 이 사람에게 주고, 아침에 벼슬을 주었다가 저녁에 파직하는 등 헛되이 구차하고 고식적인 방법으로 계책을 삼는 데 여가가 없으니 재지 기간이 오래되고 안 되었는지는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비록 현명하고 지혜로운 인사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자신의 재주를 마음껏 펴서 일의 공적을 세울 수가 있겠는가?”라고 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1987년 소위 민주화 이후 되풀이 되어 온, 대선 캠프 관련자들을 공기업 등에 낙하산 인사로 내려 보내는 일, 1년이 멀다하고 장관을 갈아 치는 일 등이 오버랩되지 않는가?“통치자가 백성으로부터 수취하는 것이 큰 만큼 통치자가 자기를 부양해 주는 백성에 대한 보답도 또한 무거운 것이다”라는 대목은 참 인상적이다. 한 마디로 정부나 정치인들은 납세자인 국민 귀한 줄 알고, 거두어간 세금을 제대로 쓰고,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국민에게 제공해줘야 한다는 얘기다. 600여 년 전 봉건정치가도 알았던 이 원리를 지금의 위정자들은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있을까?
“현자로서 천록(天祿)을 타먹는 자는 마땅히 천직을 잘 수행할 것을 생각해야 옳은 일이며, 천록만 타 먹고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라는 말은 공무원, 정치인들 월급값 하라는 얘기다.
“국용(國用)을 쓰는 데 있어서 반드시 양입위출(量入爲出. 수입을 기초로 하여 지출을 행함)의 원칙을 지켜서 헛되이 소비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라고 한 대목은 나라빚 지지 말고 균형재정을 달성해야 한다는 요구다. 나라빚 1000조원 시대에 새삼 가슴에 와 닿는 얘기 아닌가?
“의창(義倉)의 곡식을 출납할 때에는 급한 사람만을 구제하여 부유한 사람이 혜택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하며, 사실을 확실하게 하여 원액(元額)을 축나지 않게 함으로써 이 좋은 법이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은 복지제도 운영의 대원칙을 제시하는 것으로 읽힌다. 경제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까지도 나랏돈 들여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보편적 복지’보다는 꼭 필요한 사람에게 한정하는 ‘선택적 복지’가 바람직하고, 부정하게 복지혜택을 받은 이가 없도록 하며, 과도한 복지로 인해 재정에 부담이 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가?
사실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상황을 다시 이해하게 되면서 내가 품고 있던 정도전에 대한 로망은 많이 사라졌다. 예컨대 정도전이 주장했던 재상중심체제라는 것이 과연 당시 조선의 현실에 적실한 것이었을까? 정도전을 제거한 태종이 군권(君權) 우위의 체제를 수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후일 결국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가 됐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군주제를 통해 국력을 조직화하고 근대국가로 나가는 것 아니었을까? 정도전에 대한 높은 평가는, 군부 출신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권위주의정권에 대한 국사학계의 반감의 소산은 아니었을까? 특히 정도전이 구상했던 재상중심체제를 의원내각제에 비견하는 것은 억지와 무지의 소산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의 관심은 정도전에서 현실주의 정치인 태종 이방원에게로 옮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은 여전히 매력적인 인물로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시대의 모순에 대한 그의 치열한 고민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고민에 그치지 않고 그는 결국 이성계의 무력과 결탁해 역성혁명이라는 비상수단을 통해 그 시대의 숙제를 풀어냈다.
우리는 언필칭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말끝마다 ‘국민’을 앞세우는 이 시대의 정치인들 가운데, 정도전처럼 치열하게 사는 이가 있는가? 신문 정치면만 펼치면 답답한 오늘, 그래서 정도전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래서 주말이면 나는 <정도전>을 본다. 비록 조재현이 연기하는 ‘386세대 같은 정도전’ 은 별로지만 말이다.
“현자로서 천록(天祿)을 타먹는 자는 마땅히 천직을 잘 수행할 것을 생각해야 옳은 일이며, 천록만 타 먹고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라는 말은 공무원, 정치인들 월급값 하라는 얘기다.
“국용(國用)을 쓰는 데 있어서 반드시 양입위출(量入爲出. 수입을 기초로 하여 지출을 행함)의 원칙을 지켜서 헛되이 소비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라고 한 대목은 나라빚 지지 말고 균형재정을 달성해야 한다는 요구다. 나라빚 1000조원 시대에 새삼 가슴에 와 닿는 얘기 아닌가?
“의창(義倉)의 곡식을 출납할 때에는 급한 사람만을 구제하여 부유한 사람이 혜택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하며, 사실을 확실하게 하여 원액(元額)을 축나지 않게 함으로써 이 좋은 법이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은 복지제도 운영의 대원칙을 제시하는 것으로 읽힌다. 경제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까지도 나랏돈 들여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보편적 복지’보다는 꼭 필요한 사람에게 한정하는 ‘선택적 복지’가 바람직하고, 부정하게 복지혜택을 받은 이가 없도록 하며, 과도한 복지로 인해 재정에 부담이 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가?
사실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상황을 다시 이해하게 되면서 내가 품고 있던 정도전에 대한 로망은 많이 사라졌다. 예컨대 정도전이 주장했던 재상중심체제라는 것이 과연 당시 조선의 현실에 적실한 것이었을까? 정도전을 제거한 태종이 군권(君權) 우위의 체제를 수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후일 결국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가 됐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군주제를 통해 국력을 조직화하고 근대국가로 나가는 것 아니었을까? 정도전에 대한 높은 평가는, 군부 출신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권위주의정권에 대한 국사학계의 반감의 소산은 아니었을까? 특히 정도전이 구상했던 재상중심체제를 의원내각제에 비견하는 것은 억지와 무지의 소산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의 관심은 정도전에서 현실주의 정치인 태종 이방원에게로 옮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은 여전히 매력적인 인물로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시대의 모순에 대한 그의 치열한 고민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고민에 그치지 않고 그는 결국 이성계의 무력과 결탁해 역성혁명이라는 비상수단을 통해 그 시대의 숙제를 풀어냈다.
우리는 언필칭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말끝마다 ‘국민’을 앞세우는 이 시대의 정치인들 가운데, 정도전처럼 치열하게 사는 이가 있는가? 신문 정치면만 펼치면 답답한 오늘, 그래서 정도전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래서 주말이면 나는 <정도전>을 본다. 비록 조재현이 연기하는 ‘386세대 같은 정도전’ 은 별로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