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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munhw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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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의 장자 이야기 - ⑨ 格物致知에서 齊物致通으로 장자 첫 편인 소요유(逍遙遊)를 끝내고 이제 제물론(齊物論)으로 들어간다. 소요유가 논문의 문제 제기 및 연구 목적에 해당한다면 제물론은 이론적인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적인 틀은 학자가 논문 쓸 때 가장 신경 쓰는 대목이다. 논문의 설계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요유에 이르는 설계도, 즉 소요유에 도달하는 방법이 제물(齊物)인 것이다. 물론 소요유에 이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불가의 해탈(解脫), 유가의 이순(耳順)도 그런 방법 중 하나다. 장자는 해탈과 이순보다는 제물을 소요유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으로 설정했다. 그래서 제목을 ‘∼론(論)’으로 달았다. ‘∼론’은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의미다. 제물은 소요에 이르는 방법이지만 장자의 관점일 뿐이라는 장자식 겸손함까지 배어 있다.
막상 제물론에 진입하고 나면 그 이해가 간단치 않다. 제물론에서 말하려는 바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다. 게다가 제물이란 단어조차 정의 내리기 힘들다. 제물론은 동아시아 고전 중에서 그 해석이 가장 난해하다고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탓인지 장자를 공부하겠다고 덤벼든 사람 중 적지 않은 사람이 제물론에서 막혀 공부를 포기했다는 말도 가끔씩 들린다. 그런데 제물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선 장자사상의 윤곽을 정확히 그려 내지 못한다. 어렵다고 포기하고선 제물론에 이어 전개되는 양생주(養生主)나 인간세(人間世) 편으로 그냥 건너뛸 수 없다. 게다가 동아시아 소통사상의 핵심이 제물론에 위치해 있기에 필자처럼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더욱 집중해서 제물론을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제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사물(物)을 가지런히 하다(齊)’이다. 가지런하다는 것은 ‘여럿이 층이 나지 않고 고르게 돼 있다’는 뜻이다. 이와 유사한 개념은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제가에서 찾을 수 있다. 제가(齊家)란 부모와 자녀, 부부와 형제 간에 간극이 있지만 그 간극이 구분되지 않고 고르게 자리 잡아 온전한 하나의 가정을 이룬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제물(齊物)도 사물들 중에 큰 것과 작은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사이에 구별이 없이 전체로서 고르게 위치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제물과 반대되는 의미는 혹시 격물(格物)이 아닐까. 격물이란 말 그대로 사물(物)의 격(格)을 따지는 것이기에 사물과 사물 사이엔 층이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격물은 공자·맹자의 원시유가를 근대적 사유로 업그레이드한 주자학이 강조하는 개념이 아닌가. 주자가 자신의 설(說)을 강조하기 위해 새롭게 포장한 텍스트 ‘대학(大學)’의 핵심 개념이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여서다. 격물치지란 ‘사물의 격을 따져 앎(知)에 이른다(致)’는 것이다. 즉 사물 간의 차이를 통해 지식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의 과학정신도 격물치지의 입장과 같다고 본다. 예를 들어 물과 불,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빠른 것과 늦은 것의 차이를 규명함으로써 물리학이, 또 수많은 사물이 서로 다른 원소들의 다양한 결합에 따라 이뤄지는 것을 밝힘으로써 화학이 발전해 온 게 아닌가. 그렇다면 격물은 차이의 확산을 지향하고, 나아가 사물 간의 차이를 보다 많이, 또 깊이 규명함으로써 앎에 도달할 가능성을 높인다.
그런데 인간은 앎을 왜 추구하는 걸까. 단지 잘살기 위해서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지식을 통해 인간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뉴턴이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한 근대적 사유, 즉 과학정신이 뿌리내린 이후 더욱 짙어 왔다. 즉 근대의 과학정신은 산업혁명을 도출함으로써 생산성 혁명을 가능케 했는데 이는 의식주 모든 면에서 획기적인 변화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뉴턴과 같은 과학자(scientist)가 물질적 풍요를 위해 세상의 원리를 밝힌 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의 불확실성(uncertainty)을 줄이기 위해 우주자연을 지배하는 보편원리를 찾으려 했던 거다. 그리고 공학도(engineer)들은 과학자들이 만든 우주자연의 보편원리를 생활에 응용함으로써 물질적 풍요를 이뤄낸 것이다.
불확실성을 줄임으로써 확실성을 높이는 길은 근대 과학정신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 끊임없이 추구한 게 불확실성에서 확실성으로 나아간 일이다. 하늘에선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울리고, 바다에선 태풍이 일어 큰 파도가 치고, 땅에선 가뭄이 들어 메마르면 원시시대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모든 게 불확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게 신화다. 지금은 그리스·로마 신화가 재미난 얘깃거리로 전락했지만 당시로서는 불확실성을 제거했던 의미 있는 방식이었다. 중세에 신(神)을 중심으로 세상의 원리를 설명하려 했던 것도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이제는 신화적 사유, 즉 미토스(mythos)를 대신해 로고스(logos)가 우주자연의 원리를 설명한다. 로고스는 이성에 합당하다는 합리(合理)에 기초해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근대적 사유는 합리에 기초한다. 그래서 합리성(rationality)이 오늘날 사유를 지배한다. 합리에 기초한 근대적 사유는 사물 간의 ‘차이’를 규명함으로써 지식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근대사회도 노동의 ‘차이’에 따라 형성됐다는 점이다. 근대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은 생산의 효율을 위해 ‘노동의 분화(division of labor)’가 빠른 속도로 진행돼 온 것인데 수많은 직업군이 생겨난 것도 이런 탓이다. 이에 반해 인류의 오랜 구성체인 공동체는 혈연 및 지연이라는 ‘공통’을 기반으로 형성된 구성체다. 그런데 서양인과 동양인을 비교하더라도 차이점도 있지만 공통점이 있는 게 사실이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사물과 사물 간에 차이점도 있지만 공통점이 분명 자리하는 게 아닌가. 물론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차이점만 부각되지만 멀리서 바라다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 간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아우르는 지식체계는 없는 걸까. 필자가 보기에 그런 지식체계는 분명 있어야 하고, 또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문명(文明)이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문명은 ‘문자(文)에 의해 밝아진다(明)’는 뜻이다. 즉 밝아짐은 결과이고, 문자가 원인이다. 이는 머릿속의 의미가 문자에 의해 객관화되고 명료화된다는 것이다. 사실 문자가 등장하기 이전에 인류는 눈, 귀 등 오감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자연히 의미는 주관적이며 추상적이 되기 마련이다. 문자는 이런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의미를 객관화하고 명료화하면서 지식 형성 과정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이뤄 냈다. 즉 지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엄청난 양의 지식 축적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지식체계는 문명이 지닌 의미의 절반만 수행한 결과다. 명(明)이 지시하는 밝음은 해의 밝음뿐 아니라 달의 밝음도 함께 지니고 있어서다. 명을 파자하면 일(日)과 월(月)인데 여기서 명의 밝음은 해의 밝음과 달의 밝음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의미를 객관화하고 명료화하는 데 해의 밝음은 중요하다. 또 해의 밝음은 사물을 환하게 밝히면서 어두운 그림자를 동시에 만들어 내기에 네/아니오식 이항대립(二項對立) 논리를 발전시킨다. 그렇다면 서구 근대적 사유의 토대가 이항대립이란 사실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오늘날 유행하는 0/1로 구성된 디지털 언어도 그중 하나가 아닌가. 반면 달의 밝음은 해의 밝음에 비해 그 밝기가 크게 떨어지므로 의미를 추상화하고 주관화하는 데 중요한 몫을 담당한다. 그래서 달의 밝음에서는 상상력을 키우기 마련이다.
인류는 해의 밝음과 달의 밝음을 동시에 작동함으로써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그래서 해의 밝음이 옳고, 달의 밝음이 그르다는 식으로 말할 수 없다. 제각각의 고유한 역할이 있다. 그렇다면 그 역할들이 무엇일까. 필자가 오랫동안 생각한 결과, 그것은 분석력과 상상력이라고 본다. 즉 해의 밝음으로 분석력을, 달의 밝음으로 상상력을 키워 온 것이다. 또 분석력은 과학의 몫이고, 상상력은 인문학의 몫이기에 과학적 분석력이란 말이, 인문적 상상력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사실 한 나라의 문명은 과학적 분석력과 인문적 상상력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어디 문명뿐인가.
교육도 우리의 과학적 분석력과 인문적 상상력을 키우는 게 아닌가. 그런 탓인지 제물론에서 ‘밝음으로써’라는 의미인 이명(以明)이 세 번씩이나, 그것도 중요한 대목마다 등장한다.
그렇다면 장자에게서 삶의 목표인 소요유의 상태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해의 밝음과 달의 밝음을 동시에 작동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으로 본다. 해의 밝음을 통해, 즉 과학적 분석력을 기반으로 해서 사물 간 ‘차이’를 규명하고, 달의 밝음을 통해, 즉 인문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해서 사물 간 ‘공통’을 찾아낼 때 가능할 수 있다. 노자도 그의 ‘도덕경’ 1장에서 ‘경계가 있는지 없는지 가물거리다’는 의미를 지닌 현(玄)으로 이를 표현한 바 있다. 또 중묘지문(衆妙之門)을 언급하면서 문(門)으로 표현한 바도 있다. 문은 이쪽저쪽을 가르는 벽(壁)과 반대로 양쪽을 구분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들락거릴 수 있는 공간이다. 이것이 자연의 결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우주자연의 원리를 찾는, 즉 제물을 통해 앎에 이르는 방법이다.
이런 제물의 방법을 동원할 때 우리는 여여자연(如如自然)한 상태에서 세상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고, 또 이런 상태에 이르면 소요의 유유자적함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니 제물의 목표는 단순히 앎을 추구하는 방법만은 아니다. 아마도 소요유의 유(遊)를 디딤돌 삼아 통함, 즉 소통까지를 목표로 한다. 그렇다면 장자가 궁극적으로 목표로 하는 건 제물치통(齊物致通)이 아닐까. 즉 제물에 의지해 통함(通)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닐까. 소통이 마비된 오늘날에 있어 격물치지보다 제물치통이란 단어가 우리에게 더욱 다가온다면 그것은 2000년 후에 펼쳐질 세상에 대한 장자의 예고된 의미 있는 경고가 아닐까. (문화일보 12월 23일자 24면 8회 참조)
성균관대 교수